월남참전관련자료


작성자 팔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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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이대일 상사
<22>이대일 상사
치밀한 기관총 운용 ‘둑꼬’전투 승리 견인

수도사단 기갑연대 12중대 기관총 1소대 선임하사관이었던 이대일 중사는 1966년 7월 27일, 9중대와 함께 둑꼬 기지에 배치됐다. 당시 둑꼬 기지에는 그 외에도 12중대 기관총 2소대(-)와 81㎜ 박격포 3소대가 함께 배치됐다. 그때부터 기관총과 박격포 소대는 정글 수색을 나가는 9중대를 대신해 주둔지 경계부대로 운용됐다.

둑꼬 전투가 시작된 8월 9일 밤에도 기관총소대는 1박 2일간의 수색정찰을 마치고 복귀해 지쳐 있는 9중대를 대신해 주둔지 외곽 경계에 임했다. 그러던 밤 11시쯤 북베트남군(베트민 정규군)의 기습적인 집중 사격으로 중대 기지는 단숨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당시 중대 기지에는 총 11정의 기관총이 배치됐는데 그중 기관총 1소대의 4정이 2소대 정면에 배치돼 있었다. 소대장은 며칠 전 말라리아에 걸려 후송됐기 때문에 선임하사관 이중사가 소대를 지휘했다.

둑꼬 기지는 대부분의 외곽 지역이 경사가 심한 산악 정글이었지만 이중사가 배치된 2소대 정면은 타 소대 지역과 달리 확 트인 구릉 지대로 돼 있었다. 따라서 이중사는 기관총진지를 선정할 때부터 4정의 기관총이 소대 정면을 교차해 사격할 수 있도록 하고, 탄도의 높이를 지면으로부터 1m를 넘지 않도록 하는 ‘최저표척사격’(Grazing Fire)을 고려했다. 또 자신의 지휘에 따라 기습사격이 가능토록 하는 등 사전 예행 연습과 훈련을 통해 미비점을 보완해 나갔다.

그러던 8월 9일 밤, 미군 전차가 탐조등을 켜면서 증강된 1개 대대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이 중대 기지를 기습했다. 그들이 중대본부를 목표로 박격포탄을 집중 발사, 9중대의 지휘체계는 일시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중사가 지휘하는 기관총 소대는 평소와 같이 기지 외곽 방어선을 고수했다. 이어 아군 포병의 포격이 시작되면서 적의 사격이 주춤한 사이 9중대원들이 속속 진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2소대장 이춘식 중위가 부상을 입고 쓰러지면서 또 다시 위기를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소대원들이 전투태세를 갖추기도 전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한 북베트남군이 2소대를 향해 밀려오기 시작했다. 소대원들이 육안으로 그들의 선두 부대를 식별할 수 있었지만 소대에 배치된 4정의 기관총은 숨을 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긴 것 같은 인내의 시간이었다. 이윽고 적 주력이 소대 정면에 나타났다고 판단한 이중사의 명령에 따라 4정의 기관총이 거의 동시에 기습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장애물이 거의 없는 평탄한 지역에서 적의 집단을 향해 최저표척사격으로 발사되는 4정의 기관총은 경이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적의 무리는 순식간에 추풍낙엽처럼 넘어졌다.

북베트남군은 피나는 훈련으로 단련된 정예부대였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 전개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들은 갈팡질팡 안전핀이 제거되지 않는 수류탄과 박격포탄을 발사하는 등 추태를 연출하다가 공격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때부터 초반의 위기를 극복한 9중대는 용기백배 대응태세를 갖추게 됐다. 전투가 끝난 후 정부는 이 중사의 전공을 높이 평가해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상사로 일계급 특진의 영예를 부여했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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