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참전관련자료


작성자 팔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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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한광덕 중위와 둑꼬전투
<21>한광덕 중위와 둑꼬전투
포병 관측장교가 이끌어낸 대승

1966년 8월 9일 밤, 수도사단 기갑연대 제9중대는 캄보디아 국경선 부근 산악지대 둑꼬에서 중대 기지를 습격한 1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 정규군을 물리치는 대승을 거뒀다. 둑꼬전투의 승리 요인은 포병화력 등 외부 지원화력이 결정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9중대에 파견된 61포병대대 관측장교 한광덕 중위의 역할이 지대했다.

북베트남군의 안방과 다름없는 산악지역에 중대 단위 전술기지를 편성하는 것 자체가 포병 등 외부 지원화력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 점을 수긍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론상의 전술일 뿐 실제 상황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이 공격을 감행할 경우 1개 중대 기지를 쓸어버리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3대대를 작전통제하게 된 미 제3여단장 워커 준장은 대대장 최병수 중령에게 “대대 단위로 강력한 타격부대를 편성하라”라는 작전 개념을 하달함으로써 그들은 사사건건 충돌했다.그러던 8월 9일 밤, 1박 2일간의 국경선 정찰을 마치고 기지로 복귀한 9중대는 기진맥진해있었다. 또 내일이면 중대장의 교대가 예정돼 있었다. 그 같은 분위기로 인해 중대의 경계는 대체적으로 소홀했다. 몇 차례 적의 공격 징후가 중대장에게 보고됐으나 중대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중대장과 같은 잠복호를 사용하던 관측장교 한중위가 중대장 인수인게를 위해 신임 중대장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인접 잠복호에 누워 있던 밤 10시쯤이었다. 9중대에 배치된 미군 전차가 시동과 함께 갑작스러운 사격을 시작하면서 중대 기지는 단숨에 전장으로 바뀌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한중위는 철모를 쓸 틈도 없이 중대 벙커로 달렸다. 그 순간 북베트남군의 포탄이 중대 벙커를 명중했다.

교통호에서 굴러 떨어진 한중위는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의식을 찾은 한중위가 엉금엉금 기어 중대 벙커에 들어서자마자 본능적으로 보이는 무전기를 움켜쥐었다. “호남선(대대장), 여기는 만리포(중대장) 관측장교, 호남선은 포병 무전병을 바꾸라, 넷둘 사격임무 송신한다. 화집점(표적) AB311, 방위각4360, 사격 중인 적 박격포, 포대 10발!”

그가 최초 사격 임무를 위해 사용한 무전기는 대대 지휘망이었다. 한중위를 뒤따르던 포병 무전병이 부상병에 막혀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대장을 바꾸라”는 대대장의 요구에도 한중위의 “포대 10발” 사격 임무는 계속됐다. 수정 사격도 없이 단번에 포대 10발을 사격하라는 요구는 그만큼 상황이 절박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또 그가 화력 지원 계획을 보지도 않고 본능적으로 사격 임무를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은 중요 표적의 제원을 수첩에 기록해 두고 암기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중위의 요구에 따라 최초 발사된 첫발이 적의 박격포 진지를 명중시킴으로써 적의 공격은 주춤했다. 이 틈을 이용해 제9중대는 난장판이 된 지휘체계를 추스르며 기지 방어에 임할 수 있었다. 결국 9중대가 연대 규모의 적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은 포병의 화력 지원이 결정적이었으며 중대에 배치된 미군 전차의 역할도 대단했다. 베트남전쟁에서 보전포 협동 작전의 진수를 보여 준 전투였다.

정부는 한중위의 그 같은 공로를 높이 평가해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1명의 태극무공훈장과 7명의 을지무공훈장 등 190여 명에게 훈장이 수여된 포상 규모로 볼 때 포병 등 지원 장병에 대한 포상과 훈격은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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