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참전관련자료


작성자 팔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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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이세호 중장과 베트남 전쟁
<12>이세호 중장과 베트남 전쟁
불리한 전략적 환경 속 ‘외유내강’ 지휘

베트남전쟁과 관련해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영웅은 총 15명이다. 그중 전사한 강재구·이인호·지덕칠·송서규·최범섭·임동춘 6명은 사후에 추서됐다. 남은 9명의 생존자 중 이종세·정경진·신현배·이무표 4명은 전투에 세운 공적으로, 다른 5명은 전쟁 지휘와 관련해 훈장이 수여됐다.

전쟁 지휘 관련 수훈자 5명은 2명이 한국인이고 3명이 외국인이었다. 그중 외국인은 주월 미군사령관 웨스트 모얼랜드 대장과 그 후임 에이브러햄스 대장, 그리고 남베트남 육군참모총장 까오반비엔 대장이었다. 한국인은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 중장과 그 후임 이세호 중장이었다.

이세호 중장은 1969년 5월1일, 채명신 중장으로부터 주월 한국군의 지휘권을 인수한 후 1973년 3월23일 후발대가 철수할 때까지 3년 10개월 동안 사령관으로 재직했다. 이중장은 재임 기간에 미국의 베트남정책 변화에 따라 주월 한국군의 작전을 축소하면서 전쟁을 원만히 마무리하고 철수하는 과정을 지휘했다.

전쟁 또는 전투에서 주도권 장악은 ‘전쟁의 원칙’이며 ‘전승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다. 채명신 사령관 재임 시기는 그 같은 원칙에 충실했던 때였다. 따라서 한국군은 1967년, 오작교 작전을 통해 책임 지역을 군단급 규모로 확장하는 등 적극적인 작전과 활동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전장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중장의 재임 시기는 달랐다. 1968년 1월, 베트콩의 ‘뗏(Tet)공세’를 계기로 미국이 북베트남에 평화협상을 제안하면서 전장의 분위기는 급격히 바뀌고 말았다. 그때부터 베트콩의 활동이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969년 9월, 호치민의 사망이 발표되자 대부분의 남베트남 주민들이 검은 리본을 달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등 친공산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1970년에 접어들면서 주민들의 정서를 확인한 베트콩은 자신이 베트콩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반면 한국군 등 연합군은 사단급 이상의 대부대 작전을 가급적 지양하고 수색 정찰, 야간 매복 등 현상 유지를 위한 소부대 작전으로 전환했다.

전략적 차원에서 상실한 주도권을 전술적 활동으로 만회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한국군은 1972년 4월, 안케패스 전투에서 악전고투하는 등 점차 불리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베트남 파병 후반기 한국군 등 연합군이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전장이 아닌 테이블에서 평화협상으로 전쟁을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군은 1972년 후반기부터 미군을 능가하는 최대의 파병국으로 미군의 철수에 따른 공백을 최소화하면서 평화협상이 발효될 때까지 전장을 이끌어 가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이 최소한의 의지를 관철하며 평화협상을 성사시킬 수 있었던 배경은 결국 한국군의 활약과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같은 점을 감안하면 주월 한국군은 파병부터 철수할 때까지 주어진 역할을 다했으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파병 후반기 불리한 여건을 원만히 마무리하고 성과를 달성한 이세호 사령관 등 주월 한국군의 공적은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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