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참전관련자료


작성자 팔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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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임동춘 대위와 안케 전투
<9>임동춘 대위와 안케 전투
敵 벙커 5개 격파 공격 돌파구 마련

1972년 4월 안케전투에서 전사한 고(故) 임동춘 대위는 수도사단 기갑연대 2중대 1소대장이었다.

미국이 평화 협상에 매달리면서 주력 병력을 대부분 철수시킨 상태였던 1972년 3월 말, 베트콩과 북베트남이 춘계 대공세를 감행했다. 안케전투가 벌어진 안케 고개도 그들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안케 고개는 베트남 중부 뀌년에서 서쪽 내륙으로 연결되는 19번 도로를 차단할 수 있는 핵심 요충지였다. 더구나 19번 도로는 남베트남 2군단의 유일한 보급로였다.

수도사단 예하 부대는 1970년 7월 미군으로부터 안케 고개 작전 책임을 인수하면서 소도산으로 명명된 600고지에 1중대 기지를 구축하고 1개 소대로 638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한국군도 곧 철수할 것으로 보고 1971년 8월, 638고지 병력을 중대기지로 철수시켜 교육훈련과 철군 준비에 치중했다. 그때부터 638고지에 대한 경계는 점차 소홀해졌으며 1972년 3월 말 전후 한 달 동안은 수색정찰도 없었다.

사전에 안케 고개의 638고지에 침투했던 북베트남군은 아군 소대가 철수하면서 방치해둔 폐자재를 활용, 한 달간의 공사로 강력한 진지를 구축했다. 이어 1개 연대 규모의 북베트남군이 4월11일 새벽을 기해 638고지 가까이에 있는 기갑연대 1중대 기지를 습격하면서 19번 도로를 차단했다.

안케전투의 시작이었다. 다행히 1중대가 그들을 사전에 발견, 큰 피해를 예방할 수 있었지만 그 일대에 침투한 적의 규모와 기도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안케 고개가 차단되자 연대는 4월12일 아침, 수색중대를 투입해 도로 정찰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색중대는 적의 기습으로 소대장 2명 등 7명이 전사하고 중대장 등 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연대장은 3중대를 증원, 적의 근거지로 판단되는 638고지를 공격하게 했다. 18일에는 6중대와 1연대 8중대를 측후방에 투입하고 3중대와 수색중대가 정면에서 공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매번 아군 피해만 늘어날 뿐 진척은 없었다.

22일부터는 임동춘 중위가 속해 있는 2중대가 전면에 나섰다. 그때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드럼통에 흙과 모래를 채워 고지를 향해 굴려 올리면서 엄폐물로 이용하게 했다. 그러나 나무 뿌리, 바윗돌 등이 산재해 있는 능선을 따라 무거운 드럼통을 굴려 올리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아군의 기도 노출로 피해만 입고 말았다.

공격이 실패를 거듭하며 침체에 빠져 있을 때 임중위가 앞장서 수류탄을 투척하며 적의 1선 벙커를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임중위는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그의 공세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절룩거리는 다리를 이끌며 공격을 계속한 임중위는 5개의 벙커를 폭파시키며 공격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는 날아오는 적의 집중 포화를 피하지 못한 채 호국의 별로 산화하고 말았다.

임중위의 전사로 2중대도 정상 점령에 실패했다. 그러나 임중위의 활약으로 거머리처럼 붙어 있던 적의 1선 벙커를 격파하며 공격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임중위의 용전분투는 훗날 638고지 점령의 바탕이 됐으며 목숨을 바쳐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정신의 표상이었다. 정부는 임중위의 살신성인 정신을 높이 평가, 그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고 1계급 특진의 영예를 부여했다. 육군보병학교는 그의 동상을 세워 후배들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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