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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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철
작성일 2005-09-05 (월) 00:11
ㆍ조회: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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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과고엽제


○ 고엽제 살포광경 ○
 
지루하시더라도 끝까지 읽으셔서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베트남 전쟁과 고엽제]

가마우 곶의 삼림

때마침 가랑비가 왔다. 셔츠도 몸도 젖는대로 놔두는 수 밖에 없었다. 1976년 5월 6일의 아침,
희뿌연 망그로브 숲의 물길을 작은 배는 소리도 없이 나아갔다.

월남전이 끝난지 바로 1년, 우기의 가마우 곶(岬)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함에 쌓여 있었다. 월남 최남단, 가마우의 정글은 해방 세력의 근거지 중의 하나로서 미국· 사이공(남월남 정부)군과의 사이에서 격전이 반복된 지역이다.

총성과 폭음이 벌써 들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더라도 어떤 소리 하나도 내지 않는 밀림이라는 것은 역시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였다.

새가 전혀 울지를 않는구나 하고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원숭이 소리조차 없는가 하면 잎사귀 소리조차 안 들렸다. 바람 한점 들어올 기미가 없는 '정글 지대'. 비가 멎고 안개가 걷혔다. 넓혀진 시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눈길 닿는 데까지 펼쳐져있는 '죽음의 세계'였다. 정글이 아니었다. 말라죽은 수목의 잔해만이 우뚝선채 멀리멀리 이어져 있다. 어쩐지 두려웠다. 본 일이 없는 황량한 광경. 고엽 작전의 흔적이라고 직감했다. 동시에,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어떤 종류의 공포와 촬영을 해야겠다는 긴장이 온몸을 조여 왔다. 카메라를 잡고 배에서 일어서는 나를 노를 젓는 베트남 사공이 『배가 뒤집히니 앉으시오』라고 타일렀다.

배를 기슭에 대어 주기를 부탁하고 카메라 백을 어깨에 메었다. 그때 동행하고 있던 월남인 저널리스트인 가씨가 큰소리로 말했다. 『상륙 안하는 편이 좋겠어요. 이 변두리는 화학 독물(Chat doc hoa hoc 化學毒物)로 가득차 있어서 위험해요. 올라갈 것 없이 이대로 돌아갑시다.』

그의 제지를 뿌리치고 나는 둑위로 뛰어올라 "죽음의 세계"에 섰다. 기둥뿌리를 높이 뻗은 망그로브가 밑뿌리만 남긴 채 썩어 가고 있었다. 고목 사이를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도 같은 정경만이 이어졌다. 울창하게 번성했던 정글을 홀연 이런 모습으로 변해 버리게 한 것은 60년대 말에 뿌려진 고엽제였다. 말라죽은 나무 숲속에 어린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불러 세워서 물어 보니 놀고 있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는 어부이고 집도 이곳에서 가깝다. 전쟁이 끝났으므로 소개 갔던 곳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맨발인 발은 진흙투성이였다.

『여기에는 독이 있으므로 맨발로 놀지 않는게 좋겠다.』라고 말하면서 내 가슴에는 일종의 허무함이 스쳤다. 월남인들이 보통 사용하는 고무샌달을 신으면 안전하다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 『여기에서는 살지 않는 편이 좋다』라고 가령 알려주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어디로 이주하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해변의 망구로브숲도 산악 지대나 도로변도, 강변이나 수전 지대도 고엽 작전의 목표가 된 지점은 무수히 있어서 많거나 적거나 간에 오염은 남베트남 전역에 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한 현장에 서서 『조심하세요』라고 속삭이는 것은 다만 방문자로서의 인사치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배에 돌아가기 위해 진흙투성이가 된 내 신발을 강물에 씻으면서 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떨어진 진흙으로 더러워진 물은 바다를 향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1982년초, 가마우의 숲의 같은 현장을 다시 방문해 보았다. 전번 촬영으로부터 6년이 지나 있었다. 어린이들과는 물론 만날 수 없었다. 그리고 일찍이 생태계를 통째로 사멸당한 망구로브숲은 서서 남은 고목조차 벌써 사라지고 사막화가 뚜렷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우기의 스콜과 건기의 바람, 격심한 기후의 교체가 겹쳐지면서 지표에 있던 모든것이 썩어버리고 흙속의 유기질까지 씻겨 흘러가 불모의 사막만이 남았다.

히르기과(科)의 망구로브는 강물과 바닷물이 오가는 언저리에 樹林帶를 만든다. 망구로브 종자가 떨어져서 그것이 흘러가 닿는 곳에서 발아(發芽)한다. 생육환경만 적합하다면 지상 20m까지 올라가는 거목으로 자란다. 『파괴된 삼림의 자연회복에는 1세기는 걸릴 것』이라는 식물생태학자의 추측도 있다. 그러나 사막이 된 가마우곶에 재생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고엽작전이 끝난 시점에서 헤아려보면 10년 이상이 지났다. 불이나 기후변동과 같은 자연현상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고 강력한 약품살포에 의해 사멸해 버린 숲은 재생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걸까. 고엽제의 성분은 살포후 수개월 이내에 분해돼 버린다. 불순물로서 혼합돼 있던 다이옥신만이 땅속에서 분해되지 않으나 씻겨 흘러서 이동해간다. 식물에 유해한 화학물질이 그자리에 남아있지 않더라도 당초의 독성이 흙속의 박테리아나 균류(菌類)에도 영향을 미친다면 토양이 어느정도 변해버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마우 숲에 제일 많은 망구로브는 둑 논(Duoc Nhon=Rhizophora apiculata,학명)이였어요. 20-30m까지도 자라는 종류입니다. 다음 10m 정도의 벳 탁(Vet tach=Bruguiera parreflora)이나 맘 트랑(Mam Trang=Avicennia alba), 그것들이 고엽제로 말라죽어버린 지금은 8m 정도 밖에는 자라지 않는 지아(Gia=Excoecaria agallocha)나 다 보이(Da Voi=Ceriops tagal)가 조금 보이게 되었습니다.』

사이공의 대학에서 삼림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가마우 영림서(營林署)에 있다는 청년 하 ? 훙(Ha Quoc Hung)이 그렇게 설명했다.

『자연의 회복력에 맡겨서는 망구로브 숲의 재생이 어느 세월에 될 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24,000헥타는 나무를 모두 다 심었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싹이 나오는 계절에 맞추어서 종자를 심어 식림(植林)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전체로는 16만헥타를 넘긴다는 산림재생계획. 광대한 사막에 한알한알 종자를 심어간다. 묘목으로 자랐다가 말라죽어 버리는 것이 많지만 그것은 다시 다음해에 심어본다. 가마우 곶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정신이 아찔해 지는것 같은 이 작업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

가마우 숲의 생물을 많은 일본인이 일본에서 목격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깨닫지 못한다. 가마우의 보호지역에 살고 있던 철새, 백로의 무리가 해마다 일본에 날아왔다. 예를들면 사이다마(埼玉)현 노다(野田)의 백로산은 백로의 대규모 서식지가 있어서 유명하다. 그런데 노다에 백로가 ?아드는 것이 60년대말부터 격감했다. 일본에서 퍼져가던 농약농업이 논바닥의 미꾸라지를 없앴기때문에 백로를 쫓아버린거라고 누구나가 여겼고 그것은 맞기도 했다. 그런데 백로가 일본에 오지않게된 원인이 그것만은 아니었다. 본거지인 월남의 생식지에서 고엽제를 뒤집어쓴 것이다. 서서히 말라가는 숲속에서 백로들은 부화안되는 알을 품은채 죽어간 것이 틀림없다.

인간을 포함하여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과 생존환경을 최대한으로 파괴하는 것이 전쟁인 것이다.

『이 금렵지역(Saucluary)은 무수한 들새와 동물들의 보고였지요. 그래 언제 부활할 수 있을까요.』영림서의 청년이 그렇게 말하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옛날 같으면 무리지어 날고 있었을 솔개의 모습이 안보이지요 라고 덧붙였다.

1995년의 2월이 되어서 나는 가마우곶을 다시한번 찾아보았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지 정확히 20년, 처음 가마우의 정글에 들어갔을때부터 따져도 19년이 지나있었다. 그 말라죽은 수목의 정글속에서 만났던 소년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정도의 오염지에서라면 살아 연명하는 것도 큰 일이다. 그렇지만 살아있다면 성인이 되었을 터인데 가마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전부터 마음에 걸리는 것을 나는 큰 맘 먹고 확인해 보기로 했다. 전에 알던 월남인 기자에게 19년전에 찍은 사진과 자료를 보내서 조사했더니 『그럭저럭 건강한 것 같다』는 회답이 돌아왔다. 나는 즉시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마을어른의 안내를 받아 가마우곶(岬)의 앞쪽 끝에 있는 한채의 집을 방문했다. 민하이 성 남강현 서비엔안촌, 한 젊은이가 방안에서 나왔다. 그가 바로 저 "소년", 구엔반 훈 이었다. 완전히 성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보고 기쁜듯이 손을 내밀면서도 전연 말을 하지 못했다. 몸 근육의 움직임은 부자유했고 마치 뇌성마비의 증상처럼 보였다. 그 때 말을 주고 받았던 소년이 정말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내 눈을 의심하였다. 옆에 서있던 그의 어머니가 그전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여기에 찍혀있는 것은 틀림없는 이 아이이고, 그 옆에 있는 것은 누나인 니얀이며 앞쪽은 동생이예요. 흰 개는 9년 쯤 전에 죽어버렸지요. 훈의 몸은 어린아이적부터 점점 나빠졌어요. 이 근처에는 독(고엽제)이 듬뿍 뿌려졌으니까요.』

훈의 몸은 믿을 수 없으리만치 변한 것 같다. 그러나 다행이도 중증은 아니었다. 귀는 들을 수가 있었고 판단력은 우수했다. 무엇보다도 혼자서 걸을 수 있어서 어부로서의 일을 하고 있었다. 어여쁜 아내도 있고, 한살되는 아기도 있었다. 훈의 증상과 고엽제와의 연관을 증명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저 다이옥신 투성이의 환경속에서 자랐는데도 "몸에 아무런 이변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찍이 훈 소년 등을 촬영했던 고목(枯木)의 벌판은 이제 『새우양식장』으로 변모해 있었다. 가마우곶의 전체가 손수만든 소규모의 양식지(養殖池)로 들떠 웅성거린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다. 정글을 잃어버리고 사막화된 해변의 토지를 살리려면 그러한 방법 밖에는 없었는지 모른다. 가마우에서 잡히는 새우나 토양을 조사해 보아도 오늘날에는 다이옥신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지난 20여년 동안에 모두 바다로 흘러가 버렸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이 끝난후 20여년은 베트남으로서는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몸속에 남겨진 다이옥신만은 치유할 수가 없다. 고엽제라고 하는 화학무기의 사용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범죄성"을 선명히 한다.

[르뽀] 밀림과 고엽작전

베트남의 정글은 속이 깊다. 한낮인데도 카메라에는 8분의 1이든가 4분의 1쯤의 셧터속도지시가 나타난다. 두터운 나무기둥들이 햇빛을 차단하여 눈으로 느끼는 이상으로 광량(光量)이 적은 세계인 것이다. 라왕이나 철목, 치크 등의 열대의 거대한 수목들의 밑뿌리에는 양치류나 덩굴풀이 군생한다. 바람이 불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더위는 견딜 수 없을만큼 찌는 듯하다. 우기에는 많은 거머리가 나왔다. 잎에 붙어있는 것이 독이 있는 녹색거머리이고 적황색 찰흙 지면에 있는 것이 엿색으로 투명하게 보이는 흡혈거머리였다. 검은 놈은 종종 물웅덩이에 있었다. 라오스와의 국경에서 가까운 정글을 빠져나올 적에는 이러한 거머리에 진절머리가 났다. 그러나 베트남남자들은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걷고 있을적에 엿색거머리가 기어오르면 걸으면서 그것을 한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떨어버린다. 멈추어서면 일제히 달라붙기 때문이다. 걷기에 지쳤을 때에는 바위를 찾아서 그위에서 쉬었다. 거머리는 왜 그런지 바위에만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나무 잎을 타고 오는 녹색거머리를 방지하기 위해 그물침대의 로프에는 담배의 댓진을 칠했다. 거머리 뿐만 아니라 독충이나 뱀에 대해서도 댓진은 효과가 있었다.

베트남의 해방전선 게릴라에게는 이런 정글이야말로 근거지였다. 정글속에는 먹을 수 있는 나무열매와 토란 종류도 있었다. 그러나 정글을 모르는 자에게 있어서 그곳은 무서운 공간이었다. 불타는 젯트기에서 긴급탈출장치로 뛰어내린 파이롯트가 있었다 치더라도 낙하산이 떨어진 지점이 정글이었다면 불운한 일이었다.

비상용 박스안에는 약품에서 낚시바늘까지의 생존수단이 들어 있었으나 실제 살아남기는 곤란한 일이었다. 조그만 식용식물도감에 찍혀진 토란의 그림만으로 약간의 잎모양새의 차이가 있는 독토란과 먹는 토란을 구별해낼 수는 없다. 독충류와의 대처방법도 모른다. 허기진 끝에 독이 있는 토란을 파내어 먹고는 정글속에서 미쳐서 죽어버린 파이롯트도 있다고 하는 얘기를 들은적도 있다.

그러한 정글에 적을 쫓아서 소탕 토벌하기 위해 들어가는 것은 미군에 있어서는 벅찬 일이었다. 도망쳐 들어가면 거의 다 볼 수 없게 되어 놓쳐 버린다. 깊이 쫓으면 기다리던 복병에 걸려든다.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고 중화기도 효과를 발휘 할 수 없다.

그라나 정글을 없애버리고 열대림을 말라죽게 해버리면 적은 알몸이 된다. 주변농촌들의 논밭을 전멸시키면 먹을 것도 없어진다. 그 지구의 농민을 난민화(難民化)하여서 전략촌에 가두어 버리면 해방구도 없어진다.

미국공군전사실이 종합한 『고엽작전=동남아시아에 있어서의 고엽제와 공군력』에는 타이닌성(省) 보이로이 지구에의 공격이 어떻게 행하여 졌는가가 기록되어 있다.

『…주민의 이촌(離村)을 다구치기 위해, 고엽작전 목표지역의 촌락에 최루탄도 투하하였다. 전투기에서 떨어진 폭탄중에 어떤것은 시한장치가 붙은 신관을 사용하여서, 그런것은 날아간 후에 폭발하므로 공포심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아주 효과적이였음을 난민들이 보고하고 있다』(p.111). 이러한 난민화책(策)이야말로 고엽작전의 순서이며 계획된 것이었다.

고엽작전은 1961년에서 71년까지 10년간에 걸쳐서 행해졌다. 정식명칭은 란치 핸드 고엽작전(OPERATION RANCH HAND). 란치핸드란 "목장의 풀베는 인부"라고 한다. 베트남의 정글을 베어버리겠다는 의미였던것 같다. 작전지령의 암호로서 사용된 콜 사인(call sign)은 헤이디스(Hades:지옥) 이었다. 헤이디스 완, 헤이디스 투(Hades one, Hades two)라고 교신하는 살포기가 하늘을 날며 누빌때 베트남의 대지는 바야흐로 지옥처럼 변해버렸다.

일본에 대한 고엽작전계획

처음에 고엽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바로 전에 일본에 뿌리려고 준비한 것이었다. 미국 현대사의 권위자인 스탠포드대학 B. J 번스타인 교수에 따르면 1945년 5월에 미육군에 제출된 계획은 도쿄(東京)나 요꼬하마(橫濱), 오사까(大阪), 나고야(名古屋), 교또(京都), 고베(神戶) 주변의 곡창지대에 치오시안화암모늄을 B-29로부터 투하하여 곡물을 전멸시키려는 내용이었다. 5월 2일에 포터장군과 화학부대가 주장한 것은 1,645톤의 2,4-D의 살포로 적어도 일본 곡창지대의 10%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D.워너, 『성스런 전사(戰士)』)

그러나 육군항공대사령관 H.아널드대장은 공장이나 도시를 폭격하는 쪽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더욱이 탄저병(炭疽炳)이나 보툴리누스균을 사용하는 세균무기의 개발도 진행되고 있었다.

『트루먼은 전쟁을 오래 끌게되면 세균전이나 가스전도 불사할 것이라는 암시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원폭투하에 못지않는 처참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B-29에 의한 살포의 결과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쟁이 11월까지 계속되었더라면 고엽작전은 확실히 행해졌을 것이다.』라고 스탠포드의 연구실에서 번슈타인 교수는 나에게 말했다. 육군항공대 부사령관 에이커중장은 히로시마에의 원폭투하까지 앞으로 3일 남았던 8월 3일, 대일고엽작전의 상세한 계획서의 제출을 명하고 있다. 원폭인가 화학무기인가, 어느 경우든 "써 보고 싶은 무기" 였음은 틀림없다. 그런데 보고서가 에이커에게 도착한 것은 나가사끼에 원폭이 떨어진 다음날인 8월10일의 일이었다. 이때는 벌써 일본의 항복이 시간문제였으므로 작전이 실행될 여지가 없었다. 일본은 아슬아슬하게 살포를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베트남에서의 비밀행동

베트남전이 시작되고서 고엽제는 다시 각광을 받았다. 고엽작전을 승인하고 명령을 내린 것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남베트남의 자연환경과 식량을 전멸시키면 게릴라는 움직이지 못한다. 불모지를 넓혀나가면 핵병기와 같은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문제는 여론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였다.

태평양전쟁중의 대일고엽작전계획부터 꼭 16년째인 1961년 8월10일, 최초의 실험살포가 곤쯔므북방의 도로를 따라서 비밀리에 행해졌다.

처음에는 작전을 위장하기 위해 『정부가 빌린 민간 비행기와 CIA에서 지원한 파이롯트로 고엽작전을 실행』하였다.(알렉시스 죤슨 국무차관보 제안문서) 『곡창지대의 공중에서 하는 고엽제살포로 우리나라가 화학전 또는 생물전을 하고 있다는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게끔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합중국에 대해 국제적 반발이 진지하게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것과 관련하여 이 작전은 사이공에서 베트남특별위원회가 입안한 것 처럼 작전과 병행하여 선전활동에 의해 보완되지 않으면 안될것으로 생각된다』(11월 3일부, 미합동참모본부 각서) 곧 특별항공살포중대(SASF)로 지원병이 모여들었다. 『민간인의 복장을 입고 미공군의 표시가 붙지않은 비행기에 타고, 포로가 되더라도 미국정부는 관여하지 않는데도 괜찮은가?』라는 것이 모집조건이었다. 채용되면 목적지가 어딘지 따위는 가족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지시되었다.

자기 집에 편지를 쓰는 것 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항공기에는 남베트남의 마크를 달고 남베트남군 장교가 표면상의 기장으로 타며… 작전에 미국의 참가는 일절 공표하지 않도록(맥나마라 장관은) 덧붙였다』

『사이공 주재의 놀딩 미대사는 작전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을 ICC 국제감시위원회의 사찰로부터 감추기 위해…민간화물임을 명기해야한다고…진언했다』(上同)

살포 비행기는 탄손뉴트공항내의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안전한 장소에 두었다. 그곳은 여느때 같으면 고딘디엠 대통령의 개인용비행기가 있을 곳이었다.

승무원은 모두 탄손뉴트 부지내에 살도록 제한되어서 활주로 근처의 텐트촌에서 묵었다.

이것들은 명백히 화학무기이며 화학전의 시작인 것으로 판단한 끝에 취한 위장공작이었다. 1927년의 화학무기금지에 관한 제네바협정을 미국은 아직 비준하지 않았었다. 그렇다치더라도 무엇이 그르다고 말할것까지도 못된다. 발각되더라도 어디까지나 남베트남정부가 하고 있는 것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1962년 1월11일의 사이공의 각신문은 다음과 같은 정부 성명을 게재하였다.

『(사이공발=VP)베트남공화국은 무성한 열대식물을 주요 도로에서 제거하는 실험을 하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사업에 남베트남측 요원을 원조할 것과 미국이 이에 대해 지원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 작전의 목적은 도로의 자유로운 교통을 확보하여 경작지와 기타의 용지를 새로이 만들어 내는데 있으며 나라의 경제를 개선하는데 있다. …두 종류의 화학제는 공히 독성이 없고 야생동물이나 가축, 인체, 토양에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는다』. 주역은 남베트남정부, 거들어주기는 미국, 작전의 목적은 "비밀(MAT)"판정이 찍혀있는 당시의 남베트남정부의 문서가 있다. 『베트남공화국 군참모부 카이 쾅(Khai Quang)작전 및 장정(章程) 문서번호 3/5』. 카이 쾅은 한문으로 치면 개광(開光). 우거진 것을 헤쳐서 밝게 한다는 뜻인데 이 경우는 개광작전( 開光作戰), 즉 고엽작전을 가리킨다. 내용은 "202공작"이라고 하는 코드명으로 불리운 고엽작전의 모든 사항을 베트남어로 기술한 것. 원칙상 고엽작전은 남베트남공화국이 행한 것 처럼 전제되고 표기되어 있으나 영어원문에서의 번역문이라는 것이 분명한 문서이다. 여기에는 "작전목적"이 정확히 쓰여있다.

『베트공의 해방구와 근거지를 파괴하여 공백지역으로 만들어 잠복장소가 안되게 한다.…작물경작지를 없애버려서 그들의 자족경제를 파탄시키고 보급을 곤란하게 하여 그들의 전의를 떨어뜨려 지도부를 신뢰하지 않게 한다…』

또 민사부의 "심리전계획"의 기술은 이렇다.

『약제가 인축무해라는 것을 민중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선전 삐라를 뿌리던가 확성기를 사용하던가하여 설명한다.…민중선전공작에 있어서 심리전국은 각 전술관구에 400만매의 전략적 선전비라를 지급했다. 이런 종류의 선전삐라는 내용이 고엽제의 유익함과 무해함을 민중이 잘 이해할 수 있게끔 설명되어 있어서 어떠한 곳에서도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작전이 진전되면 언제까지나 위장을 계속할 수 없다. 너무나 빤히 들여다 보이는 위장은 하지 않는다. 후에 미국은 방침을 바꿔서 미공군에 의한 작전임을 감추지 않은 채 인축무해를 내세우고 갑자기 위압적 태도로 나오면서 작전강화로 변신한다.

지상에 쏟아부은 약의 총량은 10년간에 91000㎘에 달했다. 4톤 트럭에 실으면 23000대에 가득 실어야 되는 양이다. 암호명 먼지씻기(Trail Dust)라고 불리운 살포비행에 사용한 것은 미공군 제12특별비행중대의 C-123프로바이더 24기이다. 수송기의 동체에 자동살포시스템 A/A 45 Y1과 연결된 1000갤론 용량의 탱크를 넣고 양날개와 꼬리부분에 장착된 36개의 노즐에서 약물이 고압으로 분출될 수 있게 개조된 전용기였다. 정글 위 40미터 이하의 고도를 유지하면서 시속 240㎞로 비행하여 4분 이내에 전량을 살포했다. 출격시간은 거의가 이른 아침이었다. 아직 지면이 열을 안받아서 상승기류가 없으므로 안개처럼 뿜어진 약물은 지표면으로 잘 내려갔기 때문이다. 비행기 한대의 살포로 정글은 폭80m 길이 16㎞에 걸쳐 완전히 말랐다. 바람이 있으면 그 범위는 더욱 넓어졌다. 작전중의 살포기가 대공화기등의 총격으로 위험에 처할 때에는 적재약제의 전량을 단번에 투하하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출격에는 3대에서 6대가 참가했는데 가장 많이 출격한 1967년에서 69년에는 하루 18∼27회의 출격을 하기도 했다.

살포약제의 대부분(67%)을 점한것이 에이젼트 오렌지(AGENT ORANGE)였다. 용기인 드럼통에 오렌지색의 페인트를 칠해서 다른 것과 구별한데서 그렇게 불려졌다. 약물이 오렌지색은 아니었다. 그 오렌지제는 유기염소계 제초제 2,4,5-T(트리클로로페녹시산)과 2,4-D를 1대1로 혼합한 것이었다. 혼합비가 틀리는 약제에 핑크, 그린, 디녹슬, 트리녹슬, 퍼플 따위가 있었다. 화이트(white)는 2,4-D와 피크로람의 혼합제였다. 또 한가지인 블루(blue)는 가크질산염이였는데 비소제제로서 직접적인 인체독성이 있는 것으로, 주로 수확직전의 곡물에 대해 뿌려졌다.

에이젼트 오렌지제는 정글을 말려 죽이는데 사용했다.

화학약물을 무기로 쓰는것 자체가 불법이었으나 더 큰 문제는 2,4,5-T가 다이옥신을 함유하고 있어서였다.

그것은 사염화 다이옥신의 한종류, 인류가 아는 최강의 독물 2,3,7,8-테트라클로로 디벤조 파라다이옥신이였다.

미군이 억지로 주입한 것은 아니었다. 2,4,5-T의 제조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반응생성되어진 불순물이였다. 치사독성 뿐 아니라 발암성이나 최기형성(催奇形性)과 같은 만성독성에서도 훨씬 치명적이며, 1ppt(1조분의 1), 1ppq(1,000조분의 1)라는 단위로도 인체와 환경에 심각한 오염을 일으키는 독극물인 것이다. 고엽제에는 그것이 100만-수천만ppt(수십ppm)의 농도로 혼합되어 있어서 남베트남 전토에는 168㎏(미공군산정)에서 550㎏(A.H.Westing 추계(推計))이 흩뿌려져 있다.

고엽제를 언제 어디서 얼만큼 뿌렸는가를 밝히는 자료는 미공군의 컴퓨터기록(HERBS tape 자료)으로 보존되어 있으나 결손도 있고 살포량도 실제의 86∼88% 정도만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H-34 나 UH-1 헬리콥터에 의한 살포기록은 있지도 않고 작전살포와는 별도로 늘상 행해진 군사기지 주변에의 살포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미국 재향군인국 고엽제문헌보고서에는 작전살포만으로도 대략 2,200만개론(83,600㎘)으로 보고 있다.

그 외 라오스에 대한 살포가 65년부터 69년까지의 자료에 1,595㎘로 기록되어 있다. 캄보디아의 살포자료는 미공개 상태이다. 독일의 문헌등에는 총량 91,000㎘로 추정치가 나와있는데 그정도가 사실에 가깝다.

생산부족을 몰고 온 대량살포

고엽제의 생산에는 다우 케미칼과 몬 산토, 허쿠리즈, 다이야몬드 삼록과 같은 전미국의 화학기업이 동원되었다. 65년 12월에는 호치민 루트 공격을 강화하게 되며 남부·동부 라오스에의 살포를 개시하자 생산이 따르지 못하여 종종 고엽제의 부족을 가져올 정도였다.

미국내에서는 모든것을 군수로 돌리는 조치가 취해졌으나 살포량이 격증한 67년에는 그 부족이 절정에 달했다. 그해의 비즈니스위크지 4월호는 『군부가 요구하는 2,4,5-T의 양(量)은 미국국내 생산능력의 3배나 된다』고 보도했다.

그즈음 일본의 미쯔이도아쯔화학대 보우다화학공업소(三井東壓化學大牟田化學工業所)에서는 『(67년의)10월부터 외국과의 거래로 염소계 제초제 2,4,5-T의 중간제품인 2,4,5-TCP의 생산을 시작하여 월산 55톤, 주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 수출』을 하고 있었다(69년 7월24일 부『아사히신문』). 69년에 회사측은 베트남에 사용하는 고엽제가 되는 수출이라는 것을 부정했으나 먼저 수출한 제품들이 미국으로 다시 수출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해명없이 국회에서 논의되었다.

69년 6월말이 되니까 사이공의 신문『디잉산』이 고엽작전에 의해 남베트남 주민에 출산이상이 격증했다고 하는 연재를 시작했다. 즉시 발금처분이 되지만 사태는 미국에서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K.다이안 코드니는 국립위생연구소에 올린 보고를 통해 2,4,5-T가 쥐에 기형과 사산을 불러 일으키는 사실을 알렸다. 70년 7월에는 하바드의 U.S.메세르손 교수등이 베트남에 들어와서 작전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베트남에 살포되고 있는 에이젼트 오렌지제에는 미국국내의 허용 기준치보다도 훨씬 높은 농도의 다이옥신이 혼합되어 있다는 것도 발각되었다.

이 이상 계속되는 작전은 전선의 미국병사를 더욱 위험하게 버려두는 것이라는 주장도 미국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닉슨정권은 서서히 마무리하는 식으로 살포횟수를 줄여나갔다. 작전이 정지된 것은 71년이 되어서였다.

1961년 8월10일에 실험적으로 개시된 고엽작전은 1971년 1월7일에 C-123(RANCH HAND)기가 출격한 닌 도우안성의 곡물밭의 살포와 10월31일에 헬리콥터가 출격한 살포작전으로 막을 내렸다. 10년간의 총출격횟수는 적어도 6,542회에 달했다 (HERBS tape).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던 베트남의 열대우림은 그 10년간에 갈기갈기 엉망이 되었다. 망그로브의 숲은 40%가 없어졌다. 내륙에 있는 밀림의 12%와 경지의 5% 이상이 괴멸했다. 괴멸의 총면적은 240만 헥타로 올라갔다.

작전을 끝낸 후에 남베트남에 남아있던 고엽제는 5,206㎘가 태평양의 존스톤섬으로 운반되어 3,230㎘가 미시시피주 걸프포트의 해군건설대대의 지휘하에 들어갔다. 1977년 7월15일부터 9월3일에 걸쳐서 2만4,795개의 드럼통의 약제가 소각되었다.

유해폐기물 전용의 특수소각로를 실은 발카너스호가 해상에서 소각한 것이다.

2,4,5-T와 같은 유기염소계화합물의 소각은 다이옥신의 생성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더 많은 다이옥신이 그것으로 인해 배출되어 대기와 바다를 오염시킨 일이 나중에 비판받았다.

정글에 뿌려진 2,4,5-T나 2,4-D라고 한 제초제성분 그 자체는 2,3개월에 분해되나 다이옥신만은 자연계에서 분해가 거의 안된다. 자외선에 의한 분해가 실험실에서는 확인되었으나 환경중에 방출되어서 생물의 체내나 토양에 스며든 다이옥신에는 자외선이 미치지 못한다. 증류수에는 용해되지 않으나 흙과 같은 입자에는 부착된다. 지표 가까이의 다이옥신이 비와 함께 흙탕물에 섞여서 개울에 흘러든다. 수중의 프랑크톤이 그것을 챙기면 작은 물고기가 먹어치운다. 작은 물고기를 먹은 큰물고기는 더욱 높은 다이옥신 농도를 갖게되는 것이다.

이러한 먹이사슬의 최상부에 위치해 있는것이 사람이다. 먹을거리와 물을 통하여 인체에 들어온 다이옥신은 지방조직에 축적되어 좀처럼 배출되지 않는다. 몇십년의 세월이 지나서 그것은 암을 유발하고 유전기능에도 작용한다. 그 유전 독성이 어머니에서 태아에 작용하는 통로구실에 그치지 않고 생식세포의 유전자 수준, DNA 수준에서도 손상을 불러온다면 부친이 폭로된 것만으로도 자식에게 선천적이상을 나타낼수 있다.

『미국군의 안전을 위해』채용되어 전장에 투입된 화학병기. 국제여론의 비난에 대해서는 "사람과 가축에는 해가없다"며 미국은 사용량을 계속 확대했다. 전선의 군인들은 "해가 없다"는 말만 믿고서 고엽제를 취급했다. 1969년 4월발행의 미국육군성훈련테스트 TC3-16 『폭도진압용 약제, 반게릴라작전에 있어서 화염, 가스, 고엽제 및 대인검지기의 사용』에서는 고엽작전 즈음에 "에이젼트 오렌지는 사람과 짐승에 무해하다. 항공기에서 살포한 약제에 폭로된 인간에 대한 피해는 보고되지 않았다"고 명기되어 있었다.

그러나 주의깊게 읽으면 유해성을 시사하는 대목도 있다.

"약제를 취급하면서 가루를 뒤집어쓴 병사에게 경고할 필요는 없으나 샤워를 하고 적당한 기회에 의복을 갈아입지 않으면 안된다.…오염된 항공기는 비눗물로 씻고 약품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작전, 그 자체는 끝이 났다. 그러나 화학병기로서의 보다 뛰어난 효과인 "사람에 대한 독성"을 몸에 품은채로 군인들은 귀환했다.

언제 방아쇠를 당길지 모르는 체내의 이물,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의 새로운 전쟁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또 다시 베트남에 눈을 돌린다. 귀향병들의 베트남에서의 병역기간은 기껏해야 9개월에서 1년 정도아다. 그러나 베트남은 달랐다. 사람들은 10년간의 작전중에도 그후에도 오염지역에서 계속 살아왔다. 베트남에서 무엇이 일어났는가…. 인체에 일으키는 결과는 어떤것인가. …베트남의 민중도 미국의 병사도 누구도 다 모르모트로서의 역활을 짊어진 것이었다.

[르뽀] 성장은 투쟁이었다.

베트와 도크는 성장했다. 얼굴도 모습도 소년이 되었다. 성대도 나왔고 여드름도 때때로 난다. 도크는 학교에 다니고 있다. 누구도 손도 빌리지 않고 자건거도 탈 수 있게 되었다. 베트쪽은 누워있는 것 뿐이지만….

1981년말, 하노이의 베트도크병원에서 아직 젖먹이였던 둘과 처음으로 만났을 때, "이 애들은 오래 살지 못하겠군"하고 직감적으로 생각했었다. 배가 붙은채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 생후 10개월치고는 표정도 풍부했고 손발도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허리(腰部)의 유합(아묾) 때문에 두사람의 한쪽 발 하나씩이 없어져서 반대측의 뱃속에 두개가 남아있었다. 내장도 공유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런 상태인 채로 성장할 수 있을것인가 하는 불안을 그때에는 의사단을 포함해서 누구나 안고 있었다. 베트남 각지에서 꼬리를 물고 이중체아(二重體兒)의 출생이 보고되기는 하였으나 거의가 1년 이내에 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의사인 리엔박사가 도크의 귀를 만지면서 말했다. "이것 보세요. 도크는 아파하고 있지만 베트는 아무렇지도 않지요. 다시말하면 몸은 붙어있지만 두 사람의 신경계는 명백히 별개입니다. 그렇지만 분리는 힘들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베트남의 중부고원지대, 지아라이 콘 도움성 사다이에서 두사람은 탄생했다. 고엽작전의 목표로 된 지점의 하나였다. 탄생일은 81년 2월25일, 산모와 조산부는 난산 끝에 태어난 형제를 보고는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이 둘을 진료소로 옮겼고 다시 큰 병원으로 보내져서 베트도크 병원에 도착한 것은 81년 5월의 일이었다.

양친은 그 후 이름을 밝히지않고 "두아이를 낳은것도 인정하지 않고 돌보지도 않았다"고 되어있다. 병원에서 두아이는 보아, 본의 이름으로 불렸다. 옮겨왔을때 이름이 아직 없었으므로 편의상 붙여진 것이었다. 보아, 본은 일본식으로는 지로(차남), 사부로(삼남)라고 하는 뜻의 이름짓기였다.

두 아이의 태내에서의 유합(癒合)은 고엽제에 함유되어 있는 다이옥신의 기형유발 특성을 제외하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염색체를 조사하였으나 이상은 판명되지 않았다. 유전때문은 아니라고 추정되었다. 남베트남에서의 이중체아의 출생율은 통상의 수배에서 수십배로 올라가고 있다는 보고도 벌써 나오고 있다. 이중체아를 영어로 샴 쌍동이(Siamese twin)라고 말하는데, "그 인도지나 지역에는 원래부터 많았다"라고 말하는 일본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가. 그것은 19세기에 샴(현재의 태국)에 와있던 영국인 의사가 복부가 유합된 이중체아 첸과 엔늬 형제(1811년 출생. 1874년 사망)와 만났던 일로해서 붙여진 이름에 불과했다.

WHO의 조사에 따르면 세계 각지의 출생율 차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이중체아 뿐만아니라 기형이나 유·사산도 고엽작전과 함께 월남에서 늘어난 것이야말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사실이었다.

84년, 호치민시의 투두병원에서 나는 두사람과 다시 만났다. 고엽제가 인체나 태아에 끼치는 영향을 전쟁중에 이미 알고, 피해자의 치료를 담당했던 구엔 디 곡 퐁 박사가 있는 투두산과병원에서 였다. 거기에서 보살피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병원을 옮겼던 두사람은 벌써 정식으로 베트와 도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동독의 원조로 투두 산과병원안에 세워진 베에트도이츠(越獨)병동에서 처음으로 보육되었으므로 그렇게 불리어진 것이었다. 세살이 된 두아이는 정말로 똘똘한 형제였다.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어휘도 풍부했다. 원내전화로 간호사들과 조잘거리는 것을 좋아했고 한수화기를 둘이서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기도 했다. 망고 열매는 둘 다 좋아하는 것이었다. 도크는 얌전한 아이였으나 베트는 장난감 같은 것으로 놀고 싶어지면 곧 상체를 일으켜서 두 팔로 뒷걸음치는 것 처럼 하여 원하는 장소에 갔다. 그러는 동안 반대쪽의 도크는 끌려다니기만하여 후두부의 머리카락이 빠지곤 하는 것이었다. 간호사인 무오이씨가 엄마역할을 대신했고 두아이는 그녀를 메에(엄마)라고 부르며 어리광을 부렸다.

그런 두아이에게 최초의 위험이 닥쳐온 것은 86년 여름의 일이었다. 베트가 원인불명의 열병에 걸려서 돌연 위독상태에 빠진것이었다. 6월11일, 긴급지원의 일본적십자의 의사단과 함께 나는 호치민시로 날아갔다. 유합된 채로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사람의 생명도 위험해진다. 분리수술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의사단이 도착하였을때 베트의 동공은 벌써 열려있었다. 그러나 응급처치로 병의 진행은 멈쳐져서 긴급사태에 대비하여 설비가 되어있는 동경의 일본적십자(日赤)로 이송하기로 하였다. 베트남 적십자사의 요청을 받고 일본항공의 특별기가 전후 처음으로 탄손뉴트 공항에 착륙하여 19일에는 두사람을 일본으로 옮겼다. 나도 특별기에 동승하여 일본으로 돌아왔다. 히로비(廣尾)의 일적의료센타의 무균실에서 베트는 목숨을 건졌다. 의사단은 베트의 고열과 염증의 원인을 분명히 규정하지 않고 "급성뇌증"으로 발표했다.

가을이 끝날 무렵인 10월29일, 여러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이 사태는 베트와 도크가 이러한 돌발적인 위기에 언제든지 처해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보여주었다.

그 뒤에도 베트가 폐염등을 다시 앓아서 분리수술의 일정은 구체화 되었다. 88년 10월4일, 벌써 7세가 된 둘은 투두병원의 수술대 위에 조용히 잠들었다. 오전 6시를 지나 베트남의사로 구성된 수술팀이 배치됐다.

40인의 의사단을 거느린 팀 집도의는 챤 돈 아 박사, 그를 비롯하여 담당의사 대부분이 본래 남베트남 사이공 정부군의 군의였다. 나와 텔레비젼 카메라, 둘의 입실이 인정되어 심야의 영시반에 수술이 끝날 때까지 입회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장기의 대부분을 두사람이 따로 갖고 있었다. 같이 갖고 있었던 직장과 항문, 성기, 방광등은 인공장기로 대용할 수 있는 장기이고 대부분은 도크에게 나누어졌다. 베트는 급성뇌증이래 대뇌의 손상이 회복되지 않아서 식물인간 상태였고, 체력적으로도 수술에 견딜 수 있을런지 어떨런지도 알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있었다.

둘을 분리하는 것은 긴급한 과제였으나 둘 다 죽지않게 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의사단은 수술전 긴 의논끝에 『베트도 살릴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한다. 그러나 수술중에 어떻게 해서라도 적어도 도크는 살린다』라는 결론을 내?수 밖에 없었다.

7세의 어린이에게는 한계를 넘을 만큼의 장시간 마취. 두사람의 복부를 절단하여 완전히 분리를 마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의사들은 모두 분명히 알고 있었다. 수술은 막힘없이 이끌어졌다. 일본적십자에서 혼자 와 있던 마취의 베테랑인 의사 아라까선생은 『우리는 그냥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베트남 의사들의 수술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긴 시간이었는데도 왔다갔다하거나 다시하거나 하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수술을 모두 예정한대로 이끈다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라고 수술실의 귀퉁이에서 속삭였다.

한 밤중을 지나 수술이 끝나자 도크는 곧 깨어났다. 몽롱한 의식속에서 처음 한 말은 왠일인지 "무엇이지, 무엇이지?"라는 일본말이었다. 일본에서 몇마디 배운 서투른 말들중의 하나였다. 다시 아파왔는지 베트남어로 "방으로 가고 싶어"라고 되풀이했다. 많은 의사들 가운데서 퐁박사의 웃는 얼굴을 보자 도크는 "아파요. 가고 싶어요"라고 한층 어리광 소리를 질렀다. 수술은 잘 되었다. 수술후에 올 수 있는 감염증도 없었다. 베트도 도크도 순조롭게 회복되어 이제는 아무 걱정도 없게 되었다.

훈훈한 얘깃거리가 또 하나 있다. 베트와 도크에 관한 보도를 듣고 친어머니가 수술하기 전에 병원에 왔다. 어머니의 이름은 람 디 후에(36세), 신문에 난 것이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제자식같다고 중부베트남에서 찾아온 것이었다. 『저 애들을 낳았을때 정신을 잃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어딘가의 병원에서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들어서 그러려니 여기고 있었다. 버릴 작정은 없었다』고 말했다. 베트와 도크의 두살 위의 누나가 되는 루우가 어머니 바로 곁에서 수줍게 서있었다. 베트와 도크에게는 처음으로 보는 어머니와 누나였다. 이 사람이 진짜 어머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도크는 "어머니"라고 부르지를 못하였다. 무리도 아니었다. 그들에게 엄마는 간호사인 무모이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씁쓸했지만 그러한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었다. 엄마로 여기지 않아도 좋으니 옆에 있게만 해달라고 원했다. 투두병원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아버지 되는 구엔 반 단(35세)은 콘도움에 사는것 같았으나 직업도 없고 사는 곳도 일정치 않다는 것이었다. 모친은 투두병원에서 일을 할 수가 있게 되어서 그뒤부터 도크와 가까운 병동에서 여러가지 잡무를 잘하고 있다. 도크가 후에를 마음에서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는 것은 그가 좀더 어른이 되어야 할런지도 모른다.

베트와 도크의 형제가 몇번의 위기를 벗어나 성장을 계속하게 된데에는 일본의 지원이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금전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격려의 편지를 쓴 사람도 있고, 학을 접은 사람도 있었다. 용돈을 모은 어린이도 있었다. 헤아릴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정성과 관심이 분명 커다란 힘이 된것이리라. 93년에는 고엽제에 의해 수두증이 된것으로 보이는 보 반 구옹(2년 7개월)이 시민그룹의 열의와 호소로 동경의 국립병원의료센타에서 수술을 받고 치료중이기도 하다.

베트와 도크가 탈 수 있는 휠체어를 만들어주자며 지원을 시작한 후꾸이(福井)의 『베트와 도크의 발달을 원하는 모임』이 있다. 이모임의 사무국장은 그 스스로가 휠체어로 움직이는 가와바라(江原正實)씨다. "무슨 까닭으로 당신이?"라는 물음에 그는 명쾌히 대답한다. 『베트와 도크 만큼의 장애를 짊어지고 태어났더라도 모두 함께 도와서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면 지금의 사회에 버려지고만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도움을 주려는 생각에는 국경이 없었다. 전적으로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일본사회가 안고 있는 과제를 그대로 겹쳐 안고 있는 것이다. 휠체어를 설계한 사람은 척추손상으로 손도 발도 마비되어 버린 야마구찌씨였다. 휠체어라도 한사람 한사람의 상태에 맞게 주문제작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에게 아직 분리수술전이었던 베트와 도크의『우리도 휠체어가 필요해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싸인펜을 팔에 묶어 붙이고 자를 대고 조금씩 선을 긋기 시작했다. 긴 시간이 걸려서 설계도가 완성됐다. 휠체어는 도크가 갖고 있는 잔존기능, 손의 발달을 촉진하게끔 맞춘 수동식으로 설계되었다. 특별 설계된 휠체어가 베트와 도크에게 도착했을때 도크는 굉장히 기뻐했다. 손 밑의 벨트를 움직이기만 하면 전진도 되고 후진도 됐다. 스스로의 힘으로 어디로라도 갈 수 있었다. 피로한 기색도 없이 자꾸 타겠다고 졸라댔다. 두대의 휠체어는 베트와 도크의 성장에 맞게 만들어졌고 세대째는 분리후 자립한 도크를 위해 기증되었다.

92년 8월에는 분리수술 후 처음으로 일본에 와서 고베의 효고현립종합재활센터에서 의족을 교환하고 재활치료를 받았다. 94년 7월에는 국립삼중대학에서, 복부에 붙어있는 인공항문을 떼내고 본래 갖고 있던 자기 항문기능을 부활시키고 싶어 일본에 왔다. "부활가능"으로 판정이 나왔다. 재수술을 간절히 원한 것은 도크 자신이었다. 점차 장애를 이겨가면서 자라나는 도크의 모습을 보노라면 여러사람이 도크를 돕고 있다기보다 우리들이야말로 도크로부터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 * * * * * * *

고엽작전후 베트남에는 수없이 많은 장애아들이 태어났고 죽었다. 기형과 장애의 정도가 너무심한 경우에는 유산이나 사산이 되어서 아기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사라진다. 다이옥신의 비극이 이제는 베트남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일본같이 공업화한 나라들에 총체적으로 오염이 퍼져나가고 있다. 태어남, 그 자체를 극히 행운이라할 시대에 우리들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베트와 도크의 뒷편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베트남의 어린이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존재도 그들속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Ⅱ. 미국의 베트남 재향군인

[르포] 귀환병들의 재판

대략 300만명에 달하는 미국의 베트남 재향군인들 중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질병이 이미 일부에 번져가고 있었다. 암 뿐만이 아니고 피부염, 마비, 성욕감퇴, 신경증 등 여러가지로 나타났다. 그 외에 "베트남 쟁향군인"은 난폭하다고 하여 취직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미국전쟁사상 처음으로 "진 전쟁". 그 후유증은 그들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아프게 했다. 그것은 재향군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미국사회전체가 "베트남신드롬"에 흔들리고 있었다. 병사에게서도 시민에 있어서도 "이런 일은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중증의 암에 시달리면서도 병사들의 발병원인이 고엽제가 원인이라고 계속 호소해온 베트남 재향군인 폴 류타샨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1978년 재향군인들은 『고엽제소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종군한 병사들이 "전장에서 입은 피해"를 이유로 정부를 고발한다는 것은 미국법 아래서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엽제의 독성을 알면서도 군에 계속 팔아 온" 다우케미칼과 몬산토, 허큐리즈, 옥시덴탈, 다이야몬드살록, 유니로열, 톰슨 헤이워드 등의 화학기업을 피고로 정했다.

주재판소들에 개별적으로 냈던 600건의 소송을 일괄하여 베트남에서 귀환한 미국군인과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에 의한 집단대표소송(Class Action)이라 하여, 뉴욕의 연방법원에 제출되었다.

이것에 대해 화학기업측은 『문제의 책임은 명백히 정부에 있다. 군수에 응한 것에 지나지 않는 기업이 고발될 이유가 없다』라는 주장을 거듭하였다.

독성을 알리는 동물실험의 결과에 대해서도, 60년대 중간에는 정부에 전달했다는 사실을 83년이 되어서 제출하고, 그래도 사용했으므로 전책임은 정부에 있다고 했다. 정부책임이라는 것이 되면 소송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84년, 이 소송이 성립한다라는 판단을 연방지재가 내렸다.

심리가 시작되면, 누구나 무엇을 은폐하며, 범죄적 결과를 일으킨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 등 모든 문제가 명백해질 판이었다. 5월이 되어서 대법정에서의 본심리가 막 시작하기 직전, 화학기업측은 1억8천만 달러를 지불할테니 화해하자는 제안을 와인스타인판사를 통해 내밀었다. 책임은 일절 없다고 말해온 기업측이 태도를 돌변한것이었다. 철야의 대화 끝에 귀환병측 변호단은 승소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타결은 재판 개정을 수시간 앞둔 당일 새벽녘이었다. 그리하여 단 한사람도 법정에서 증언할 필요가 없게되었다. 후에 밝혀진 바와같이 『병과 고엽제와의 인과관계를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레이건 정권의 방침』이 그때 이미 나와 있었다. 피터샤크의 『법정의 에이젼트 오렌지』에 의하면 타결된 화해의 금액은 화학기업측이 은밀히 지불할 작정이었던 액수보다 훨씬 밑도는 것이었다. 변호단은 이것을 금후에도 나올지모를 질병을 포함하여 끝내는 것으로 하고 1300만달러가 넘는 수수료를 받아챙겼다.

그러나 화해금을 받은 피해자측은 귀환병에게 나누고보니 '푼돈' 밖에 안되었다. 불치의 암에 걸리던가 죽던가 하면 받을 수 있는 돈은 3200달러 정도였다. 해병대의 대위였던 남편을 간장과 췌장의 암으로 잃은 샤리 아이비 부인은 이 '푼돈' 받기를 거부하고, 89년에 다시 화학기업을 고소했다.

"화해"에 가담한 기억도 없고, 그 후에 고엽제 피해가 나타나서 사망했으므로 전 귀향병과 가족까지도 이 화해에 묶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제2의 집단소송으로 되어 미국전체의 주목을 모았으나 결국은 연방법원의 와인스타인 판사에로 송부되어 각하돼 버리고 말았다.

위장된 다이옥신 연구

귀환병의 질병에 대한 의학적인 인과관계의 조사는 80년대에 행하여졌다. 아트랜타의 방역센타(CDC)에서의 역학조사결과는 "귀환병의 발병율은 일반인과 비교하여 유의한 차는 없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고엽제의 영향 따위는 없다는 과학적증명이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조사가 조작되었다는 것이 90년대에 들어와서 드러나게되었다. 고엽제에 폭로된 보병중대 200명의 자료가 빠져버리고, 고엽제에 폭로가 안된 1000명의 보병대대 자료가 삽입되었던 것이다. 병역기간도 9개월이 아닌 6개월의 단기를 넣었다.

이렇게 "차(差)가 나지 않도록 하기위한 자의적이고 사기적인 방법"(줌월트 제독 평)이였음이 마침내 증명되고 만것이었다.

이 "조작"을 지휘한 것으로 보이는 CDC의 퀘논 호크박사는 뉴욕타임즈 지상으로 『다이옥신의 독성은 이제까지 과장되어 왔다. 그것이 암을 유발한다하여도 약한 발암물질에 지나지 않는다』(91년 8월15일부)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독성재평가" 발언은 화학·제지업계를 기쁘게 했다.

미국의 환경보호국(EPA)은 제지공장에서 나오는 다이옥신의 배수기준을 0.013ppq(1000조분의 0.013)로 하는 지침을 내놓고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 박사는 500배나 높은 7.2ppq로도 괜찮다고 하는 권고를 죠지아주 당국에 대해 내었다(주마다 독자적인 기준이 인정되기 때문에). 그러나 이 권고도 제지업계로 부터의 배후조정에 의한 것이였음이 미의회에서 박사 자신의 증언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92년 2월25일부의 에니쟌 월스트리트 져널은 『다이옥신에 관한 이러한 재평가 발언은 제지업계와 염소화학업계로부터 윤택한 자금원조를 받은 선전 캠페인의 결과였다』라고 지적했다.

또 하나의 위조 스캔들은 89년 10월3일에 행하여진 일리노이주의 공소심에서 명백해졌다. 이제까지 정부나 기업측이 "다이옥신의 인체위해는 없다"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어온 화학기업 몬산토의 자료에 관한 것이었다.

1949년에 일어난 공장재해로 다이옥신에 폭로되었던 노동자를 30여년 추적조사한 결과 노출되지 않았던 그룹과 비교하면, 83년 현재 암사망율은 같다라고 주장했었다. 이 "연구"에서의 조작은 폭로되었던 쪽의 암사망자 18명 중에서 5명을 대상에서 빼고 폭로되지 않은 사람을 폭로그룹에 4명을 섞어 희석시키는 방법을 쓴것이었다. 이렇게해서 쌍방 9명씩 암사망율을 같게 했다. 이러한 조작이 발각되어 정정한 결과 노출되었던 그룹의 암사망율은 65%나 높다는 것이 증명되었던 것이다.

몬산토의 자료는 그때까지 모든 재판에서 인용되어 인체에의 영향을 부정하는 결정적인 자료로 사용된 범죄적인 조작이었다.

상업계의 "암 감추기" 조작은 몬산토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85년에는 서부독일 BASF도 30년전에 일어난 공장노동자의 다이옥신 피폭사고에 관하여, 암발생의 비율이 다른경우와 차이가 없다라는 자료를를 당연하다는 듯이 발표했었다. 그러나 이것도 몬산토와 같은 상투적인 수법으로 암발생율이 비슷하게 조작했음이 밝혀지고 말았다.

89년의 제9회 다이옥신 국제학회에서 그것을 공표한 프리드맨 레루다 박사는 원래의 올바를 자료를 기초로 다시 평가하면 폭로노동자의 호흡기암 2.66배, 소화기암 2.55배의 발생율이 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국립산업안전위생연구소(NIOSH)의 마리린 핑거헛 연구원들에 의하면 노동재해로서의 다이옥신 피폭과 질병에 관한 13년간의 추적연구(91년 발표)도 암발생율이 높은 것을 뒷받침 해준다. 1942년부터 84년 사이에 다이옥신에 노출된 12개 공장 5,172명의 노동자의 암사망율은 폭로되지 않은자에 비해서 평균 15%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더욱이 1년이상 오염직장에서 일한 그룹은 암사망율 비율이 46%나 높다. 그 태반은 연조직육종암이었다. 또한 재향군인국이 실시한 해병대원의 사망율조사(87년)에 의하면, 고엽제 살포지역에 종군한 자는 타지역에 있던 자와 비교해서 비호치킨임파선암이 110% 높았다. 폐암은 58% 높았고 연조직육종암에서는 8배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92년 5월, 워싱톤의 줌월트제독 사무실을 방문했을때 그는 『내 추정으로는 정부가 통계수치를 내지 않으려는 것도 문제지만, 베트남귀환병의 4,000∼5,000명 이상이 이미 암에 걸려있고 어린이들의 선천적 이상은 그 수를 웃돈다』고 단언했다.

제독은 90년 6월26일에 행하여진 미하원 『인적자원과 정부간 관계소위원회』에서의 공청회에서도 증언하고 있고, 공공연구에 손을 봐서 자료를 조작한 사실을 강하게 규탄함과 동시에 『에이젼트 오렌지(Agent Orange)는 폭넓은 종류의 질병과 선천이상을 일으키고 있어서, 귀환병에게 정당한 보상을 하여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원 소위원회는 8월 "위장된" 연구가 큰손 노릇을 한 사태를 『더러운 "과학"과 정치적 조정』의 결과였다고 단죄했다.

93년 7월이 되어서 미국과학아카데미는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다이옥신의 인체에의 영향에 관하여 6,020종의 연구논문을 조사하고, 그중에서 중요한것 230종의 연구논문을 특별조사위원회가 재조사하여 고엽제가 호치킨씨병과 비호치킨임파선암, 연조직육종암이라는 3종의 암과 염소성 여드름, 만발성(晩發性)피부포르피린증 등 2종의 피부장해의 발생원인임을 확인했다.

더욱이 고엽제와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는것으로 폐암등의 호흡기암과 전립선암, 다발성골수종이 드러나게 되었다.

미국 재향군인국은 확인된 질병을 즉시 구제대상으로 추가하여 염소성 여드름을 포함한 9종의 질병에 대해서 보상을 하기로 하였다.

무슨 증상이든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귀환병의 1할, 약 30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현단계에 7만명이 피해를 자각하여 치료를 받고 있는것으로 되어 3만9천4백19명이 보상신청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93년 단계에서 상병보상금이 나가고 있는것은 겨우 4백86명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지 20년이 지났는데도 미국에서는 "그 베트남전쟁"이 아직도 귀환병들을 계속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가치없는 생명"에 대한 "실험"

미국의 화학기업은 당시 실험을 통해서 알게된 다이옥신의 독성에 마음이 걸렸다. 그러나 그 데이타를 손에 든 채 고엽작전은 감행되고 있었다. 83년 9월19일자 뉴욕타임즈는 고엽작전이 절정을 맞기 직전의 1965년에 다우케미칼이 위험을 잘알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1965년 3월24일에 미시간주 밋도란드의 다우케미칼 본사에서 개최되었던 화학기업 4사의 비밀회의는 고엽제 중에서 찾아낸 유독오염물질 다이옥신의 건강에 대한 위험을 의제로 하고 있었다.…거기에 참가한 허큐리즈사의 화학자 C. L 던은 다음과 같은 메모를 남겼다. "다우케미칼측은 『놀라운 양의 독성불순물』이 2,4,5-T 중에 함유되어 있다고 하는 조사결과에 대해 말했다." 또 포넘씨는 "이 사태가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킬것을 다우케미칼은 극히 두려워하고 있다 "고 쓰고 있다….』

동물실험을 통해서 분명히 확인되어간 발암성과 최기형성, 그러나 "인체에 무엇이 일어나는가"라는 문제만은 실험실내에서 확인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에서 집중호우형 대량살포가 거듭된것은 다우에서의 비밀회의에서 잠시 지난 67년부터 69년에 걸친 일이었다.

독성을 알고난 후 한층 강화된 베트남에서의 화학전, 거기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면 내 눈에 히로시마와 나가사끼가 아로새겨진다. 원폭투하후에 사람 몸에 생긴 이변을 미국은 종전후 바로 히로시마에 설치한 원폭상해조사위원회(ABCC)에서 철저히 조사했다.

피폭자를 치료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실제는 치료보다는 방사선으로 진물러진 피부와 체조직의 표본채취가 계속적으로 행하여졌고, 그것은 미국에 보내졌다.

신형무기가 전장에 투하되었을 때, 그 효과가 어떠했는지를 조사하는 작업이 빠질 수는 없었다. 보다 위력있는 무기의 개발에 그것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전장은 흡사 인체실험실 같은 곳이었다.

64년에서 68년까지 베트남 파견군총사령관이었던 웨스트 모랜드장군의 발언은 이렇다. 『동양에서는…서양만큼 생명에 높은 가치를 두지않는다. 목숨은 남아돌아서 싸다. 동양철학이 말하는 것과 같이 목숨은 중요하지 않다…』(『Hearts and Mind』). 서양인에 비하면 우리들 아시아인의 목숨은 가치가 낮다고 한다. 그것이 동양사상이라고 거짓말을 섞으면서 그의 본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것이 오직 웨스트 모랜드만의 생각은 아니다. 미군들은 이러한 "멸시"를 가슴에 새기고 전장에 보내졌다. "국(Gook)을 죽여라"는 변말(암호말)이 그런것이다. 국(Gook)이란 베트남 사람이나 중국인, 일본인, 인디안 등의 황색인종을 가리키는 업신여김말로서 끈적끈적하는 더러운 생물, 얼간이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 따위는 죽여도 괜찮다, 상대는 짐승이다. 이것을 반복해서 배워가면서 용맹한 해병대원들이 자라났다.

베트남 사람에게 총을 겨누고 사격하는 것은 사냥이었다. 쏘아죽인 시체에서 귀를 오려모으는미군이 많았던것도 사냥감에 대해 하던 것과 마찬가지 였다. 손미사건과 한가지로 여성과 어린아이에 대한 학살도 자주 있었다.

그리고 화학무기가 제네바협정에 저촉되는 "비인도적"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지역에서만 사용함"이라면 가슴 아플일도 없었다.

홀무즈버그 감옥의 수인(囚人) 모르모트

"중요하지 않은것"으로 간주된 생명에 대한 처사는 나치 독일에 의한 유태인학살과 일본군의 남경대학살등의 선례가 있다. 전쟁은 그러한 잔학행위를 선동하고 공인하며 표창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이 표면화되는 것은 전쟁에서 끝나지 않는다. 차별과 멸시, 억압은 몸 가까이에서 큰 팔을 휘두르며 나타난다.

형무소의 수인에 대한 멸시는 그들이 "인체실험"의 대상이 됨으로써 세상에 공공연히 알려졌다.

60년대 중간에, 다우케미칼은 그들에게 다이옥신을 실험투여한 것이었다. 수인의 생명에 대한 가공할 경시. 발각된 것은 1980년말의 일이었다.

81년 1월11일자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지등의 각 지는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 실험은 펜실베니아대학의 알버트 M. 크리그맨 박사(피부과)가 다우케미칼사와 1만달라의 계약으로 행한 것으로서 홀므즈버그 감옥의 수인들(70명)이 대상이 되었다. EPA(환경보호국)에서의 공청회에서는 크리그맨박사가 66년에 0.2∼16마이크로그람을 60명에 투여한 것이 밝혀졌다. 이때에는 아무런 급성증상도 일어나지 않았으나 다음해에는 1개월에 걸쳐서 하루걸러 7.500마이크로그람을 10명에게 투여했다. 그중 8명은 4개월에서 7개월에 걸쳐서 피부질환 염소성 여드름으로 괴로워 하였다.…박사와 감옥당국, 다우케미칼은 모두 수인명부도 기록도 일절 남아있지 않다고 EPA에 회답하고 있다.

크리그맨은 다시 펜타곤과 펜실베니아대와의 총액 3백86만4백86달러에 오르는 계약에 의거해서 3백20명의 수인을 상대로 최면, 의식콘트롤제등의 비밀실험을 하고 있었던 일도 판명되었다. 대상으로 하는 인구의 50%에 심신장애를 가져오게 하기 위해서는 투여량이 얼마정도가 되어야 하는가를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모르모트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을 수인들이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빨리 출소하고 싶어하는 수인들은 형기단축과 교환하는 피험승락서에 싸인을 했다. 서류에는 화학물질의 이름과 위험은 없다는 뜻만이 쓰여 있을 뿐이었다. 수인을 사용한 이런 실험은 후에 법률로 금지되었지만 당시에는 합법적이었다. 피험자들이 그후에 암이 될 위험이 커서, EPA는 그의 치료를 보증하고 행방을 찾고 있으나 이제껏 한사람도 못찾았다.

이 인체실험에서 다우케미칼이 무엇을 파악하였는가는 밝혀있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후에 베트남에서의 살포량이 급증하였다는것 뿐이다.

그러나 베트남에 대한 화학무기의 투입으로 미국에 몇가지의 오산이 생겼다. 첫째로 아군의 오염이 대규모로 발생해버린 것이다. 적진에 대한 공중에서 하는 살포를 상정(想定)하는 한 미군의 오염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장에서의 실태는 빗나갔다. 지금은 필라델피아에 살고있는 공정부대원인 D. 로니는 내게 『공군이 살포한 뒤라는 것도 모르고 우리들은 정글에 들어가 토벌작전을 계속했다. 약물로 젖은 옷을 며칠씩이나 입고 지냈고 오염된 강물을 마시면서 싸웠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둘째로 "해가없다"는 선전을 미군들에게도 철저히했기 때문에 누구도 오염을 무서워하지 않은 것, 그것이 피해를 확대했다.

셋째로는 미국이 전쟁에 패퇴해버렸기 때문에 폐허로 변한 베트남에 "고엽제상해조사위원회"를 설치할 수 없었다는 것.

미국은 다이옥신의 가공할 독성을 베트남 사람이 나닌, 자국의 재향군인의 몸을 통하여 급히 검증해야 되는 어쩔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조사해보니, 재향군인의 지방조직중 다이옥신량이 41.7ppt, 혈액중에는 46.3ppt에 달했다(P. C. 건 기타 『JAMA』1988년 9월).

그것은 일반 미국시민의 다이옥신 농도 4.3ppt에 비해 대략 10배나 높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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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엽제와참전군안 전창수 2005-09-04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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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엽제란 후유의증 2005-09-03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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