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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푸른하늘
작성일 2008-11-24 (월) 14:02
ㆍ조회: 595  
IP: 125.xxx.243
이런 내용 알고 계시지요. 같이보고파서...
 

대한민국 국민은 반드시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베트남 공산화과정을 답습하는 한반도 정세!

33년전 월남 패망 전야와 꼭 닮은 한국의 혼란위기



"월남 패망 현장 목격자의 악몽"



  이 글을 쓴 이대용 육사총동창회장은 월남 패망 당시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 담당 공사로서 월남 패망 과정을 지켜보았고, 월남 패망 후 월맹군에 체포돼 5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한 경력이 있다. 李회장은 「요즘 자꾸 사이공 함락장면이 꿈에 나타난다..」면서「베트남과 한국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일란성 쌍둥이」 라고 말했다.



李회장은 「대통령과 학자, 지식인들이 우리와 역사 문화적 배경이 다른 독일에서 통일의 교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월남 패망을 연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다」 라고 말했다.



다음은 李회장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월남과 한국은 일란성 쌍둥이



  우리와 월남의 역사는 너무나 닮은꼴이다. 그래서 평소 나는 한국과 월남을 일란성 쌍둥이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역사를 표현 할 때 흔히 「반만년 배달민족」 이라고 하는데, 월남은 「반만년 황룡(黃龍)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국가체제를 이룬 역사적 시기도 비슷하고, 중국이 팽창하면 조공(朝貢)을 바치다가 중국이 혼란에 빠지면 자주독립을 유지하는 것도 비슷하다. 중국의 주변민족으로서 끝까지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온 점 역시 같다.



  월남이란 지명은 중국 전국시대에 월족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 세운 나라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전 세계에서 과거제로 관료를 선발하는 문치주의의 나라는 그 제도의 본고장인 중국을 제외하면 조선과 월남이 대표적인 표본이다. 모든 역사와 인명을 한자로 기록한 것도, 중국의 주변부에서 민족이 소멸 당하지 않고 생존한 것도 양국이 비슷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한국은 한번 성립된 왕조는 그 수명이 보통 400∼500년인데 비해 월남은 120년으로 우리보다 상당히 짧다는 점이다. 그것은 월남 민족이 우리 민족보다도 분열이 더욱 심했다는 뜻이다. 중국의 지배권에 있다가 식민지를 경험한 것도 비슷하며, 식민지에서 해방될 때 남북의 허리가 잘려 분단된 사실, 그리고 북에는 공산정권, 남에는 자유 민주정권이 수립된 것 역시 비슷하다. 양측이 무력을 동원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인 사실도 동일한 역사적 패턴을 보인다.



  지역감정이 드센 것, 식민잔재 청산 문제(한국은 친일파, 베트남은 친불 친일·친 중파)로 인한 정통성 논쟁, 각 정치 세력 간의 끝없는 분파(分派)와 이합집산(離合集散), 그리고 정쟁(政爭)을 벌이는 것까지도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모른다.



  1954년 7월21일 프랑스 원정군이 베트남 독립군에게 패해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17도선 이남에는 자유민주주의 정부인 베트남 공화국(越南)이, 그리고 이북에는 공산정부인 베트남 민주공화국(越盟)이 수립됐다. 이후 월남은 독자적인 힘으로 자주국방을 하지 못해 미군의 도움을 받았고, 결국에는 미군을 중심으로 연합군이 파병돼 공산군과 싸운 것까지 한국과 비슷하다.



  청렴결백했지만 독재로 기울었던 고 딘 디엠 정권이 쿠데타로 쓰러지면서 수차에 걸쳐 군부 쿠데타가 반복되었다. 이 와중에 정권은 부패와 내부분열을 거듭했다. 전쟁에 지친 미국이 월맹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에 돌입한 것은 1968년 5월 10일이다. 그 무렵 미국은 직접전비(直接戰費)와 간접전비를 합쳐 연간 495억 달러(1968년), 508억 달러(1969년)를 퍼부었고 미군 병력도 53만 6,000명 선을 파병할 정도로 전쟁의 절정을 이루던 시기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진행되는 베트남戰에 진저리를 쳤고, 결국 수렁에서 발을 빼기 위해 월맹의 레둑토와 비밀협상을 시작한 것이다.



  파리에서 미-월맹 간 비밀 협상이 시작되기 전 해인 1967년 9월 3일에 벌어진 월남 대통령 선거에는. 무려 11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하여 이전투구(泥田鬪狗) 양상을 보였다. 이 선거에서 당선자인 웬반티우에게 차점(次點)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딘쥬는, 선거유세에서 「동족상잔의 전쟁에서 시체는 쌓여 산을 이루고 있다 우리조상이 이처럼 외세(外勢)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슬퍼하겠는가. 월맹과 대화를 통해 얼마든지 평화 협상이 가능한데, 왜 북폭(北爆)을 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가.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북폭을 중지시키고, 평화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하겠다」 고 주장하며 미국과 월남 국민들의 반전(反戰) 여론을 자극했다. 이처럼 월맹에게 호의적이던 그가 공산군의 프락치였음이 밝혀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다.



  한편 미국과 월맹이 파리에서 비밀 평화 회담을 진행 중인 사실이 알려지면서, 월남 내부에서는 국론(國論)이 두 갈래로 갈렸다. 여당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주장하며 평화회담 참여 거부를 주장한 반면, 야당은 앞다투어 포용정책을 들고 나와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회담 참여를 지지했다. 고민에 빠진 월남 정부는 어쩔 수 없이 회담 테이블에 나가야 했고, 1969년 1월 15일부터 미-월맹 2자 회담은 미-월남-베트콩(베트남 인민해방전선. 후에 베트남 임시혁명정부-월맹의 4자 회담으로 확대되었다.



  한쪽에선 평화회담, 다른 쪽에선 대남(對南)공작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5년여 협상 끝에 베트남전을 종식하는 역사적인 휴전 회담이 열렸다. 이 휴전의 담보를 위해 키신저는 월맹에 40억 달러(20억 달러는 미국 직접원조, 20억달러는 국제은행(IBRD) 차관)의 원조를 제공, 이것으로 피폐한 월맹의 경제 재건을 돕기로 하고 교전 당사국인 미국 월남 월맹 베트콩(베트남 임시혁명정부) 등이 서명했다.



  美 국무장관이었던 키신저는 보다 확실한 휴전을 담보하기 위해 휴전감시위원단인 캐나다·이란·헝가리·폴란드 4개국을 서명에 참여시켰다. 이리하여 4개국 250명으로 구성된 휴전감시 위원단은 하노이와 사이공, 그리고 휴전선을 감시하게 되었다. 한편 월맹에서는 하반라우 외무차관이 150명의 고문단과 함께 사이공에 체류했다. 일종의 인질 형식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믿지 못한 미국은 영국·소련·프랑스·중공 4개국 외무장관까지 서명에 참여시켰으니, 파리 휴전협정은 4+4+4 즉 무려 12개국이 담보하고 보증한 값비싼 서명문서였다. 그리고 월남과도 방위조약을 체결, 이제 미군은 철수하지만 월맹이나 베트콩이 휴전협정을 파기(破棄)하면, 즉각 해공군력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하고 월남 지상군을 지원키로 굳게 약속했다.



  더불어 주월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동안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최신 무기까지도 모두 월남에 양도하여, 그 무렵 월남 공군력은 전 세계에서 4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처럼 철저한제도와 장치를 마련했기 때문에, 키신저는 주월미군이 철수하더라도 휴전체제가 최소한 10년은 갈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수년간 미국의 골칫덩어리였던 베트남전이 휴전을 맞게 되면서 전 세계에는 평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닉슨의 데탕트 정책과 한반도에서 1972년부터 시작된 남북대화 등으로 세계평화는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大勢)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파리 휴전협정의 성과로서, 미국의 키신저와 월맹의 레둑토는 197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그런데 레둑토는 『나는 한 일이 별로 없다. 나보다 평화에 기여한 사람이 많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이에 대해 세계인들은 그가 월맹의 당 서열 5위였기 때문에, 자신의 위에 있는 지도자들을 염두에 둔 「동양적 겸양의 표시」라고 이해했다. 결국 키신저 혼자만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이 생각은 착각이었다. 그들은 미군의 북폭과 경제봉쇄로 피폐해진 나머지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하자 평화회담에 나섰으나, 그것은 전략의 변함이 없는 채 전술만 바꾼 셈이었다. 레둑토가 키신저와 평화회담을 벌이는 한편에선 1950년대 중반에 수립된 대남 기본전략이 더욱 공고히 다듬어졌다. 그것은 「베트남에서 침략군을 몰아내고 민중봉기를 일으켜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남반부에 창출하고, 무력으로 남반부를 해방시켜 조국통일을 달성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지금도 북한이 견지하고 있는 대남전략과 단 한 치의 차이도 없다.



대한민국 국민은 반드시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월남의 90%를 정부가 지배했지만…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을 때 월남 국토 44개 성(省) 중 12개성의 곳곳에만 표범의 반점처럼 공산군 점령지가 남아 있었다. 총 인구의 90.5%는 월남이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중 5%는 낮에는 월남, 밤에는 공산측이 지배하는 경합(競合)지역, 그리고 4.5%는 공산 측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월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과 경제력 우위를 바탕으로, 공산측 지배를 월남 내(內)에서 자연스럽게 소멸시킨다는 전략을 세웠다. 휴전 무렵 월맹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인해 매년 80만∼100만t의 식량부족,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은 줄기찬 대남공세를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휴전협정 이전부터 숱한 공산당 프락치들이 월남 곳곳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었다. 그래서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과,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인구의 0.5% 정도가 월남 사회의 저층(底層)에서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1969년 6월 6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베트남 임시혁명정부로 개편될 당시 이 정부의 법무장관이었던 쫑뉴탄의 증언에 의하면, 캄보디아 국경선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월남정부의 각 부처와 월남군 총사령부에서 이루어지는 극비 회의내용이 단 하루후면 상세하게 보고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해 있었다고 한다.



1967년 대선(大選)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쭝딘쥬와, 당시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를 위시한 많은 정치인·관료들이 모두 공산 프락치였음이 알려진 것은 월남 패망 후의 일이었다.



  반면 월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對共)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월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형해(形骸)만 남아버렸다. 그들은 대(對)월맹 정보 수집은 말 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월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조차도 무기력했다.



 한 나라를 망하도록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정보기관부터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浮沈)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결국에는 간첩하나 못 잡는 이빨 빠진 고양이로 전락한 사실을 나는 너무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월남 패망 당시, 외적(外敵)이 아니라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휴전협정 이후 월남은 월맹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의 하나 월맹군이 도발하더라도 즉시 미국의 해. 공군이 개입하여 북폭을 재개할 것이고 이후 대(對)월맹 경제 원조도중단하면, (당시) 세계 4위를 차지할 정도로 월등한 월남군 기동력과 화력으로 월맹군의 공세에 당연히 맞설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 후에 온 휴전 체제에서 평화를 거부하는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국방과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혹은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았다. 결국 그 믿음이 국방을 소홀히 하도록 하였고, 내부적으로도 극심한 정쟁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1975년 9월에는 월남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정치인들은 대선 승리를 위해 이합집산과 분열, 반목, 대립과 갈등을 유감없이 연출했다. 고질적인 사회악이었던 뇌물과 마약, 매춘과 도박이 정치권의 혼란과 맞물리면서 마치 전염병처럼 전 국토를 휩쓸었다. 정부의 부정부패는 국민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계층 간 갈등이 조장됨으로써 공산 프락치들의 활동공간은 점점 넓어져 갔다. 결국이 선거가 최후의 자유선거가 되고 말았다.



정규군 58만 명 중 10만 명이 위장휴가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군내(軍內) 부정부패였다. 당시 월남 정규군은 58만 명이었는데, 이 중 10만 명이 뇌물을 주고 비공식 장기휴가를 받아 대학에 다니거나 취업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장군들이 운영하는 사(私)기업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이처럼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군인들을 가리켜 당시 월남에서는 「유령 군인」, 「꽃 군인」이라 불렀다.



  나는 군 재직 시절, 미 육군참모대학에서 훗날 월남대통령이 된 티우씨와 만난일이 있었다. 그 후 주월 대사관 무관(武官)으로 파견 됐을 때, 티우는 대령으로서 사이공 부근의 사단장으로 재직 중이였다. 그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자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다시 월남으로 보낸 것이다. 그래서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티우 대통령과는 속 깊은 이야기를 자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비록 독재로 기울기는 했지만 대단히 청렴결백했던 고 딘 디엠 대통령 시절, 월남군은 용맹하게 공산군과 맞서 싸워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덕택에 휴전당시 월남은 전 인구의 90%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지도층의 부패였다.



   티우 대통령의 사위가 군에 입대했는데, 그는 이름만 군적(軍籍)에 둔 채 외국 유학을 떠나 버렸다. 대통령 사위가 그럴 정도였으니, 다른 고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일단 입대한 다음 뇌물을 써서 선진국으로 유학을 보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게다가 월남 지배층은 사리사욕과 부정축재, 황금만능주의에 빠져 천민자본주의의 극단을 보였다. 반면 「국가에 대한 의무」라는 말에는 코웃음을 치며 등한시함으로써 체제파괴 세력들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늘날 기회가 날 때마다 사회 지도층 인사와 그 아들들의 병역기피 사례가 언론에 공개되는 모습은, 25년 전 월남에서 벌어진 바로 그 일들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후방이 부패와 혼란에 빠지고, 사회에 정의감이 상실되자 일선의 군인들은 「저따위 썩은 정권과 나라를위해 내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가」하며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또한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가 퍼져나가자 공산군에 대한 경계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월등히 높은 경제력과 막강한 화력을 가졌던 월남군대가, 식량부족으로 고민하던 월맹군에게 허수아비처럼 붕괴한 가장 큰 원인이다.



시민·종교단체를 좌익이 장악



  한편 이 무렵 월남에서는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드리꽝 스님 등이 모여서 「구국(救國) 평화 회복 및 반(反)부패 운동 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이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일종의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이 순수한 반부패 운동 조직에 공산당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반체제 세력으로 변질시켜 버렸다는 점이었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자, 사이공에는 100여 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월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그리고 좌익인사들이 한데 뒤섞여 반전운동, 인도주의 운동, 순화운동 등 상상할 수 있는 그 모든 운동단체들을 총동원하여 티우 정권 타도를 외치고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75년의 월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으로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1974년 10월, 월남에서는 유전(油田)이 발견되어 온 국민이 흥분에 휩싸였다. 나라 전체가 평화 무드에 젖어 있던 상태에서 석유까지 발견되자 사람들은 더욱 자유분방함과 안일주의에 기울어 갔다.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월맹의 하노이에서는 극비리에 남침을 위한 비밀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레준 서기장은 당시 닉슨 대통령 사임으로 어수선한 미국이, 월맹이 남침공세를 펴도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침 전쟁의 결정을 내렸다.



  1975년 1월 8일, 월맹군 18개 사단 총병력을 월남 공격에 투입하기 위한 군사력 배치가 개시됐다. 이 총공세를 현지에서 지휘하기 위해 월맹군 육군참모총장 반띠엔둥 대장이 1975년 2월 5일 하노이 공항에서 AN-24기를 타고 극비리에 이륙했다. 반띠엔둥 대장은 2월 6일 호치민 루트를 타고 중부월남 고원지대의 전략 요충인 반 메뚤의 서쪽 밀림 지대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가 중부월남으로 잠입한 사실을 기만하기 위해 하노이에서는 그와 비슷하게 생긴 가짜 반띠엔둥이 볼가 승용차를 타고 매일 저택에서 월맹군 총사령부로 출퇴근을 하도록 했다. 반띠엔둥은 배구를 즐겼는데, 운동 시간이 되면 가짜 반띠엔둥이 나와 배구를 하는 등 치밀하게 철저한 위장을 했다. 그러나 이미 거덜이 난 월남 정보기관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이 무렵 나는 월맹군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티우 대통령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당시 월남군 정예부대는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이었다. 나는 티우 대통령에게 「지금 월남은 자유라는 미명하에 게릴라들 전쟁터가 됐습니다. 아무래도 조짐이 이상한데 정보기관에서는 이렇다할 아무런 보고가 없으니, 일단은 도지사 소속으로 되어 있는 민병대 병력을 무장시키고 공수사단과 해병사단을 각각 군단으로 강화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은 허허 웃으면서「지금 우리 정규군 병력이 58만 입니다. 또 미국과의 방위조약이 시퍼렇게 살아 있고, 월맹도 북폭으로 거덜이 난 상태인데 저들이 침략할 힘이 남아 있겠습니까?」며 완곡히 거절했다. 티우 대통령은 확고한 반공 지도자였지만 평화에 눈이 멀어 유비무환을 잊었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월맹은 경제가 허약하고 식량과 물자 부족이 심화돼 조만간 붕괴할 체제에 불과한 것으로, 우습게보았던 것이다.



우익 ·애국인사 암살



  월남은 몇 개월 후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심한 혼란상을 연출하고 있었다. 거대 여당이었던 대월당(大越黨)은 대통령직에 눈이 먼 인사들의 탈당으로 분열, 각개약진을 거듭했다. 오늘날 어떤 정당에서 공천을 못 받았다 해서 뛰쳐나가 자신이 몸담았던 당의 지도자를 공격하는 모습은 25년 전 내가 월남에서 체험했던 정쟁과 어찌 그리도 닮은꼴인가.



  그 무렵 반공(反共)을 외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익 인사들은 다음날이면 시체로 발견됐다. 1973년까지 연 평균 무려 840명이나 암살을 당할 정도였다. 티우 대통령이 수상으로 지명하려 했던 유명한 반공지도자 웬반홍, 사이공대학의 우익 학생 지도자, 그리고 반공을 주장하는 언론인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되면서 지식인과 중산층, 언론은 침묵을 선택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국가 안보와 반공, 국가 정통성 수호를 외치면, 말과 글과 구호로 무장한 좌파 인사들이 무차별 공세를 펼침으로써 「말없는 다수」들이 침묵하는 상황도 33년 전 월남과 다름이 없다. 이 와중인 1975년 3월 10일 새벽 2시, 월맹 공산군이 중부월남에서 오래 전부터 침투해 있던 프락치들을 이용, 주민들을 선동하며 총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각지에 분산·고립된 채 총체적 부패와 전의 상실에 빠져 있던 월남군에게는 이미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월남군은 곳곳에서 패퇴하며 밀리기 시작했다.



  월맹군에게 허를 찔린 티우 대통령은「즉각 정쟁을 중지하고 일치단결 하여 침략군을 무찌르고 자유월남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한편 국제휴전감시위원단에게 「공산군의 북위 17도선 이북으로의 철수」를, 미국에는 방위공약의 이행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것 하나 이행되지가 않았다.



  티우 대통령의 간곡한 대국민 호소가 발표되자 「구국평화 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의 지도자인 짠후탄 신부는 이렇게 대답했다. 「중부월남 고원지대에서 반민주, 부정부패를 일삼는 티우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그곳에 월맹군은 없다. 티우는 책임지고 사퇴하라」



  짠후탄 신부는 미국의 대월 방위공약을 철석같이 믿고서, 더 이상의 월맹군 공세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서 티우 대통령에게 타격을 주고 몇 개월 후 실시될 대선에서 자기들이 미는 후보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이런 발언을 한 것이다. 다른 야당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월맹을 이용한다며 격렬히 비난했다. 이 와중에 웬까오끼 前 부통령은 티우 대통령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으나 내부분열로 실패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반체제 운동가들 - 통일 후 감옥으로



  반띠엔둥이 이끄는 월맹군이 중부월남 고원 지대에서 승리를 거둔 후 월남군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해 버렸다. 그들은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한 채 후퇴만 거듭하다가 결국 50%의 병력이 붕괴, 해산됐다. 3월 26일 다낭이 함락됐고, 이후 월맹군 18개 사단이 사이공을 향해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유령 군인」과 「꽃 군인」들은 가족과 함께 배와 비행기로 월남을 탈출하고 있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이 하야(下野)하고 재야(在野) 정치인 정반민 예비역 대장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남침 후 한 달이 지난 이때까지도 미국은 대월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다.



  4월 29일 월맹 공산군 14개 사단이 사이공을 포위했다. 사이공에는 패잔병들만 남아 있었다. 라이케에 주둔 중이던 월남군 제5사단장 레웬비 장군은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 사단 병력을 이끌고 사이공으로 진격하기 위해 월맹군 포위망을 공격했다. 그러나 수적으로 비교가 되지 않았던 월남군 제5사단은 월맹군 1군단 대병력과 결사 항전을 벌이다 궤멸 당했다. 레웬비 장군은 조국의 패망을 비통해 하면서 권총으로 자결, 나라와 운명을 함께 했다.



  1975년 4월 30일 정오, 월맹 공산군 제2군단은 사이공 시내로 진격하여 탱크부대가 월남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위치한 독립궁을 점령했다. 월남 대통령 정반민은 포로가 됐고, 이로써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월맹을 압도한다고 자랑하던 월남은 월맹군에 의해 너무도 허무하게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은 사이공 함락 직전, 월남군 장성과 그 가족을 헬기에 실어 남지나 해상의 항공 모함으로 철수시킨 후 미국으로 망명시켰다.



이름아이콘 홍진흠
2008-11-25 18:27
푸른하늘님이 옮겨오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분명히 상기해야하며 깊이 간직해야할 사연입니다.
우리가 이런 내용과 모든걸 알고있지만 요즘의 젊은세대들은 모릅니다.우리가 할일은 그들에게 한
사람 한사람 교육시키는 방법밖에 없다고 봅니다. 좋은 저녁되세요.
   
이름아이콘 소양강
2008-11-25 20:54
푸른하늘님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온국민들이 정신차리지 아니하면 않되겠다는 생각을하여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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