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수기
작성자 최종상        
작성일 2008-11-22 (토) 13:37
ㆍ조회: 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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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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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남전 의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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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령관 채명신님의 대외 개방전략]      

 
명분과 실리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미군 지휘관 회의에서 소신표명을 계속했다. 

" 저는 개인적으로 웨스트모어랜드 사령관을 존경합니다. 한국전 때 웨스트 장군은 제82공정사단의 대령으로서 북한 순천
상공에서 부하들과 함께 낙하산으로 뛰어내려 용맹을 떨친 지휘관이십니다. 저분의 지휘권아래로 들어가는것은 개인적으
로는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것이 정치적으로는 저 분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군 지휘관들도 이해하는 분위기로 돌았다. 이로써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월남 측과 협의하여 행사하는 쪽으로 정리
되었다. 게릴라 전술의 전문가 채명신 소장은 육군본부에서 작전참모부장으로 일하면서 월남전을 연구했는데 비관적인
판단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 나는 월남전의 작전개념을 수립하면서도 나 자신은 월남에 가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디다.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베트콩은 군복을입은 정규군이 아니라 민간인 행세를 하는 게릴라들이었습니다. 월남정부는 민심을 떠나고 있었고 월맹
지도자 호지명의 인기는 높아가고만 있었습니다. 아홉살짜리 꼬마의 호주머니 속에 수류탄이 들어있고 어린아이를 업은
아낙네의 옷속에 권총이 숨겨져 있는 이런 상황에서 과연 미군의 작전개념인 '수색 및 섬멸작전'이 실효를 거둘수 있을지
의문만 생겼습니다." 

채명신 장군의 작전개념은 '분리 및 섬멸'이었다. 민간인 속에 숨어있는 베트콩들을 대민심리전을 통해서 분리하여 산속
으로 격리시킨뒤 군사작전을 통해서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채명신 장군은 "
미군과 함께 활동하다가 보니 그들이 아시아의
역사 문화에 얼마나 미숙한지 알게 되었다"
고 덧붙였다. 

1964년 월맹은 정규군을 월남의 중부고원지역으로 침투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은 월남에서 조직된 베트콩을 지원하고 지도
하는 역할을 했다. 무기표준화를 통해서 베트콩과 월맹 정규군은 같은 공용화기를 쓰게 되었다. 1965년 초 미국은 월맹의
4개 정규 사단이 월남에서 작전중임을 확인하고 '롤링 선더'(Rolling Thunder) 작전을 시작했다. 이는 정규사단의 남하
를 저지하기 위해 북위 19도선 이남의 월맹 군사기지들을 폭격하는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월맹정규사단의 남침은 계속되어 1965년말 현재 6만4000명이 월남에서 작전중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월남의 민족해방전선은 인민혁명당이란 명칭을 가졌으나 공산당의 위장조직에 불과했다. 혁명당 당수는 구엔 반 린. 1964
년 월맹은 구엔 치 탄 장군을 남파하여 민족해방전선의 군사부문을 총지휘하게 했다. 린은 탄 장군의 보좌관이 되었다. 월
남전을 하노이에서 지휘하고 있던 월맹 국방장관 지압은 시간이 공산군 편이란 확신하에서 월남전을 정치전쟁적인 성격으
로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전쟁에서 승패는 전장이 아니라 여론과 언론의 영향을 크게 받는 국내정치 무대에서 결
판난다. 

국제법상 월남전은 월맹에 의한 불법적인 남침이란 성격을 지닌다.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하여 월남은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이다. 월맹은 17도선을 무시하고 군단 규모의 정규군을 남파했던 것이다. 남파의 방식이 김일성
의 남침처럼 기습적인 총공세가 아니라 장기간의 위장침투였기 때문에 국제여론의 반격을 피할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베트콩이 월남에서 자생적으로 나타난 반정부 세력인 것처럼 선전했고 세계의 많은 언론들이 '월남정규군의 명백한 남침'
을 경시하는 보도 태도를 취했다.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입장에서는 국제법을 위반하여 자유진영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남침한 공산세력을 물리치는 데 파병
할 도덕적이고 국제법적인 뚜렷한 명분이 있었다.
월남파병을 통해서 주한미군을 월남전선으로 빼돌리려는 미국측의
의도
를 사전에 봉쇄하는 한편, 파병에 따른 경제적 이득과 국군현대화에 대한 미국측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실리와 명분을 고루 갖춘 파병 이었던 것이다. 

그 뒤 월남과 미군이 전쟁에서 패했고 월남이 월맹에 흡수통일되었다고 해서 한국의 파병 이유까지 부정적으로 평
가될수는 없는 것
이다. 평가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국가이익과 국제법, 그리고 인류의 보편적 가치여야 하는 것이다.
통일된 월남이 이제 와서는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개혁하고 있는 점을 볼때 월맹이 승자였다고 해서
월맹의 공산혁명노선이 옳았고 그에 반대한 한국의 파병은 나빴다고 해석하는 것은 승패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논의가 될 것이다. 

1965년에서 70년까지의 6년간 월남파병에 따른 미국측의 대한 지원총액은 9억2700만 달러였다. 그 주된 내용을보면 월남
에서 한국회사들이 미군과 맺은 구매 또는 공사계약이 3억500만 달러로 가장 많았다. 미군에게 한국측이 공급한 물건값이
1억4400만 달러, 미군이 부담한 한국군에 대한 각종해외수당지급액이 1억3000만 달러, 월남파병을 계기로 유보되었던 군
원이관 계획(한국측이 분담해야 할 군사비)액수가 9300만 달러, 한국군의 군수물자 조달에 대한 미군측의 지원이 5000만
달러 등등. 

1966∼71년간 월남에서 한국회사들이 벌어들인 외화는 5억3700만 달러에 달했으며공사 및 용역제공, 한국인 기술자들의
송금, 그리고 군수물자 수출을 통한 외화가 득이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년엔 1억1340만 달러, 69년엔 1억420
만 달러, 70년은 9700만 달러에 달했다. 

최성수기엔 80여개의 한국회사와 1만6000명의 기술자들이 주로 미군과 계약하여 활동했다. 월남전이 절정에 달했던 1968
년의 경우 무역외 수입으로 분류되는 공사-용역 등 월남으로 부터의 각종 외화가 이득은 그해 상품수출액의 36%나 되었다. 

한국남성의 자신감 회복 

박정희정부는 월남에 한국군을 파견하여 피를 흘리는 대가를 미국측으로부터 아주 비싸게 받아냈다. 1966년 초 미국이 1개
전투사단의 추가파병을 요청하는것을 계기로하여 우리가 끌어낸 미국측의 각종지원은 이른바 '브라운(주한미국대사)각서'
에 구체적으로 규정되었다. 이 각서에 따라 미국은 월남파병에 따른 장비와 각종 경비를 한국군에 제공하고 파월장병들의
급여도 지불하며 주월 한국군이 구매하는 물건은 최대한 국내에서 조달해야 했다.


*주월미군과 월남군이 구매하는 물건 가운데서 일정 품목은 한국에서 발주한다,
*월남에서 활동하는 미국회사에 한국인들의 취업을 적극적으로 보장한다.
*미국 국제개발처(AID)가 월남에서 실시하는 농촌건설 등의 사업에 필요한 물품을 한국에서 많이 구매한다,
*한국의 수출진흥을 위한 기술원조를 강화한다,
*맹호부대 파견을 전제로 미국측이 약속했던 1억5000만 달러 차관 외에 같은 성격의 AID차관을 추가적으로 제공한다 등등... 

한편 한국군에대한 미국의 원조도 월남전 기간에 급증했다. 1964년에 1억2200만 달러, 65년에 1억1250만 달러이던것이 66
년엔 2억2810만 달러, 67년엔 4억3220만 달러, 68년엔 6억5630만 달러, 69년엔 4억1890만 달러, 70년엔 3억7150만 달러,
71년엔 5억9790만 달러, 72년엔 4억5400만 달러에 달했다. 66∼72년 사이 한국군은 총31억5800만 달러의 군사원조를 받은
것이다. 이는 월남파병의 조건으로 우리 정부가 요구했던 국군 현대화 사업에대한 원조가 늘어나는 등 한미간의 군사협조가
원활해졌기 때문이다. 

1964년부터 1972년까지 월남전선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총병력은 연인원으로 31만7000여 명. 전사자가 3806명이고
비전투중 사망자는 1154명으로 합계 4960명. 부상자는 1만1062명(전투중 8480명, 비전투중 2582명)이었다.
총사상자는 1만6022명. 

우리정부가 월남전으로 얻은 막대한 경제적 이득은 이들 사상자의 피로 얻은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국제관계
에서 타국을 돕기위해 흘린 젊은이들의 피값은 가장 비싸게 계산된다는 교훈을 여기에서 확인할수 있다. 한국전에서 미군
이 흘린 피값은 지금껏 우리가 물고 있다. 그것은 미군에게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양도한 것등 외교와 안보정책에 있어서의
대미 종속성, 그리고 국내 시장의 대미 개방 같은 것들이다. 군인들의 피는 절대로 공짜가 아닌 것이다. 

월남전으로 마련된 거대한 시장에 진출한 한국인들과 기업은 국제무대에서 경쟁할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했다. 실전경험
에서 우러나온 이런 자신감을 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1970년대에 한국인들은 중동 건설시장 등 세계로 뻗어나가 민족의 활
동공간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다. 

오원철(상공부 차관보/청와대 제2경제수석 역임)은 '한국 남성들은 월남에서 미국인들과 함께 일하고 싸워보면서 처음으
로 자신들의 잠재력을 실감할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월남체험 이야말로 한국남성들에겐 최초의 집단적인 국제화 경험이
었던 셈이다. 

1965년 가을 한일조약의 국회비준과 월남파병안을 처리하여 여유를 갖게 된 박대통령은 모처럼 청와대 출입기자들을 정원
으로 불러 간단한 다과회를 가졌다. 한 기자가 "새로 만든 각하의 상황실을 구경시켜주실 수 없습니까"라고 물었다. 대통령
은 말이 없었다. 다른 기자가 "그곳에는 전국 공무원들의 신상자료가 다 들어 있다는데…"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박대
통령은 "그럼 보여주지"라고 말하더니 앞장을 섰다.

본관 집무실 동쪽에 마련된 10평 남짓한 방으로 들어간 기자들은 의외의 광경에 놀랐다.  삼엄하고 화려할줄 알았던 상황실
벽을 벽지가 보이지않을 정도로 뒤덮고 있는것은 통계수치와 도표, 그림이 많은 각종 상황표였다. '조세징수사항' '무역동향'
'산업시설 건설현황' 등등. 기자들의 눈을 특히 강하게 끈 것은 한국지도 위에 그려진 수많은 공장들의 굴뚝 표시였다. 준공
된 공장, 건설중인 공장, 공장 건설예정지 등등. 

박대통령은 지시봉을 들더니 기자들에게 각종 경제통계를 설명해갔다. 괘도를 척척 넘기면서, 그러나 보지도않고 숫자를 거
의 외우면서 설명하는데 착오가 없었다. 박대통령은 "이런식으로 나가면 우리도 70년도에는 자립경제를 달성할수 있을거야"
라고 했다. 그가 말한 자립경제란 미국 원조를 받지 않는 경제를 뜻했다. 

부산일보 김종신기자가 "각하 방에는 온통 경제문제밖에 없군요"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싱긋 웃더니
"배가 불러야 불평이 없는거야"라고 했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신문기자들도 정부를 무조건 헐뜯으려고만 하지 말고 정부가 하는일에 협조를 좀 해주시오. 그렇다고 잘못한 일을 잘했다
고 써달라는 건 아닙니다. 올바른 관찰과 판단 아래 잘하는것은 잘한다고 해주어야지 열심히 하는데 헐뜯기만 하면 의욕이
저하 되는 거요." 

박대통령은 경호실 옆에 신관을 짓겠다면서 "아침에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집무를 보고 2층으로 퇴근하니 다람쥐가 쳇바
퀴 돌듯해서 소화가 되지 않을 지경"이라고 했다. 신관을 지으면 집무실을 거기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새 집이 마련되면 기
자들에게도 큼직한 방을 하나 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지켜졌으나 2층 내실과 1층 집무실 사이를 출퇴근하는 일은
10,26사건 날때까지 계속되었다. 박대통령은 새 집무실을 가진다는 것에 대하여 마음에 큰 부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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