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수기
작성자 최종상        
작성일 2008-11-22 (토) 13:34
ㆍ조회: 732  
IP: 222.xxx.240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배경
 


한국군  월남전 참전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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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참전배경


20세기 중반 세계는 자유화 공산이라는 이데올로기가 대립 충돌하고 있었다.
그 당시 월남은 17도선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분단,
남쪽의 월남공화국은 자유진영의 일원이었다.
북쪽의 공산세력에 의하여 월남공화국이 존립위기에 처하자
1964년 5월9일 미국의 존슨대통령은 한국을 포함한 25개 자유우방국에 대하여
월남공화국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동년 7월15일 월남정부가 우리정부에 정식으로 지원요청을 했다.

그리하여 태권도 교관단을 포함한 국군 제1 이동외과병원이 월남으로 이동,
의료봉사활동권도를 보급했다.
이어서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에 의해 월남의 지역건설을 적극 지원하는
건설지원부대가 파견되었고
전쟁이 확대 되면서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전투부대가
이동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배경에는 한국군전투부대가 참전하지 않을 경우,
주한미군이 월남으로 이동한다는 설이 대두되고 있었으며
이 같이 된다면 제2의 6.25전쟁이 일어날 것이란 불안감도 있었지만
당시의 국제 역학상 한반도의 전쟁방지,
그리고 세계평화와 자유수호에 기여한다는
우리국군의 월남전 참전은 필연적이었다.

월남전에서 우리 국군은 독립적인 작전지휘권을 확보하고
중대기지전술로 책임지역을 평정하는 한편 지역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월남정서에 맞는 양민구호사업을 꾸준히 실시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국군은
월남에서 최상의 군대로 역할과 소임을 완수하였으며,
1975년 4월30일 공산세력에 의하여 자유진영의 일원국이었던
월남공화국은 사라졌다.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의 지대한 노력과 지원이 있었음에도 공산세력과
맞서는 전략전술 부재와 끊임없는 책동과 분열,
그리고 연합군이 철수하고 미국의 지원이 삭감되자 전투의지가
나약해져 결국 붕괴되고 만 것이다.

특히
우리정부는 사회주의월남과 경제협력 외에도
양국간 군사협력을 합의 했는데 이와 같은 현실에서 파월국군의
명예회복이 쉽지않은 터에 미국의 용병설까지 겹치고 있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졌다 해도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여 참전후유증의
최소화와 파월국군의 명예는 회복되어야 한다.
이것은 국민의 안보관 정립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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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대창설 : 1965. 9. 25 .서울 필동 (채명신 소장)★

★참전기간 : 1965. 9. 25 - 1973. 3. 23★

★참전군인 : 13,133명 ( 4,064명, 사병 9,069명)★

★희 생 : 전사 45명 (장교 18명, 사병 27명)★
부상 54명 (장교 9명, 사병 45명)

★사령관 : 초대 중장 채명신 , 2대 중장 이세호★

★부대지휘 : 주월사를 비롯하여 3개 전투부대(맹호, 백마, 청룡)와 1개군수 지원부대(십자성),
                              1개 군사원조단(비둘기), 2개 수송전대(백마, 은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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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백마부대

수도사단 제26연대/제9사단(4차파병)

전장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려면 더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린 미국은 한국군이 월남전 수행을 위해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였으며
1965년 12월 러스크 미 국무장관은
제20차 유엔총회 참석차 방미중인 이동원 외무부장관에 제4차 파병을 요청하였다.
정부는 미국이 제3차 파병시까지의 한,미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대미협상과정에서 합의사항이 구두약속이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1966년 2월 25일
한,미 양국은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브라운 주한 미대사간에
14개 조항으로 된 합의의사기록에 서명하였다.
이번에는 문서화하려는 의도 하에 합의의사록을 작성 제의하였다.

미국측과 협의가 끝난 직후 1개 전투사단과
1개 전투연대로 구성된 제4차 파병안은 1966년 2월 28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3월2일 국회에 제출되었으며,
국방위원회에서 12일동안 열띤 논쟁끝에 3월 18일 표결처리 되었고,
제55회 국회 214차 본회의에 상정되어
밤을 꼬박 지새우는 난항끝에 3월20일 오전 재석125명 중
찬성 95명, 반대 27, 기권 3명으로 통과되었다.

전투부대 증파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수도사단 제26연대는 곧 부산항을 출발하여 6일만인 4월 15일
퀴논에 도착하여 남쪽지역에 전개하였는데 이로써 수도사단은 3개연대로
완전 편성된 전투사단으로서 보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파월부대로 지명된 제9사단은 한국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려
'백마부대'라고 명명된 전통있는 사단(사단장 이소동, 육사2기)이었다.
제9사단은 수도사단의 경험을 토대로
인원선발 장비교체를 실시한 후, 약 2개월간의 강도 높은 교육훈련을
끝내고 3진으로 나뉘어 월남으로 출발하였다.

8월27일 중앙청에서 환송대회가 끝난 후
8월30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25일 나트랑(NhaTrang)에 상륙하여
해병 제2여단이 주둔했던 투이호아(TuyHoa)의 작전지역을 인수하였고,
2진인 사단사령부와 제29연대는 9월20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9월15일 나트랑에 상륙, 북쪽의 닌호아에 전개하였다.

제3진인 제30연대는 10월3일 부산을 출발하여 8일에 캄란에 도착,
청룡부대가 담당하고 있는 판랑 비행장 경계임무와
제28연대가 담당했던 지역을 1960년대 후반에 들어와 TV와 신문 등 언론들이
계속해서 월남전의 비참한 전투장면을
보도함으로써 미국내에서는 반전여론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1968년 11월 미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닉슨은
1969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후 월남에서 단계적인 철군을 발표하였고,
7월부터 병력을 철수시키면서 월남화 정책(미국이
월남전을 월남인에게 맡기고 미군을 순차적으로 철수시키기로 한 감축계획)을 추진하였다.
★파 월 : 1966. 9.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6. 9. 22 월남 나트랑에 상륙, 인근지역인 닌호아에 주둔했다.

★참전기간 : 1966. 9. 22 - 1973. 3. 11

★참전군인 : 100,336명 (장교 6,445명, 사병 98,891명)이 참전하여
★희 생 : 전사 1,320명 (장교 78명, 사병 1,250명)
부상 2,410명 (장교 160명, 사병 2,250명)

                    ★사령관 : 초대 이소동소장에 이어 박현식, 유창훈, 정규환, 조천성,
김영선 소장이 지휘

                              ★전투 : 211, 714회 (대부대 전투 478회, 소부대 전투 211,236회)

1967. 1. 29 혼마산에서 벌인 백마 1호 작전을 비롯하여, 1967. 3. 8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전국의 동맥인 1번도로를 개통한 오작교 작전과 1967. 7. 9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작전을 비롯하여
박쥐작전, 도깨비작전 등 전사에 길이 빛낼 많은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특히 월남국민의 숙원이었던 1번도로 개통은
월남군과 연합군이 공격기도를 하지 못했던 적의 지배구역이였으나
1967. 3. 8부터 맹호부대와 합동작전을 전개하여 월남국의 대동맥인 1번도로를
완전개통함으로써 한국군 백마의 위용을 다시한번 과시했다.
전사에 길이 빛낼 백마의 전승은 천하무적 백마의 전설을 남겼다.

★대민사업 : 대민농사, 노력봉사,
의료봉사, 도로 및 주택건설, 급수시설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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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의 왕자 맹호부대

(보병 수도사단)

(※ 참고 : 브라운 각서)
통킹만 사건이래 월맹측이 계속해서 비엔호아 미공군기지, 탄손누트 공항,
사이공 미군숙소와 중부 고원지대 풀레이크 미공군기지를 공격함으로써 미군측은
항공기를 포함한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에 존슨 미국 대통령은 북폭을 재개토록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월남전은
점차 가열되어갔다.

미국은 월맹에 북푹을 계속하면 그들이 베트공에 대한 지원과 남부침투를
중지하고 협상테이블로 나올 것을 기대하였으나,
월맹은 미국의 협상을 거부하고 병력을 부대단위로 침투시켜 월남군 진지를
하나씩 유린시키는등 월남전이 확전 되어가자
미국은 가일픙 복푹을 강화하는 한편 지상에서도 확전을 단행하였다.

이에 미국은 월남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많은 병력을 월남으로 이동시키면서 1965년 초 존슨 미대통령 특사인
로지(Henry C.Loge)는 박대통령을 방문 한국군 1개 전투사단의 파병을 요청하다.
당시 미국은 본토의 예비부대와 해외주둔부대를 월남전에 투입하였으므로
주한 미군 2개사단도 언제 월남으로 이동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박대통령은 국가안보가 최우선이라는 확고한 신념속에
미국의 전투부대 파병요청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차에 이동원 외무부장관이
전투부대 파병문제로 브라운 주한미대사와 협상에서 파월병력의 상한선은
5만명이내로 할 것등 브라운 미 대사에

①한국군 현대화를 지원할 것

②북한군 침공시 미군이 즉시 출병할수 있도록 한,미방위조약을 개정할것
③한국군 파월에 따른 일체의 경비를 미국이 부담할것
④월남에서 사용할 군수품 공급 등 한국의 월남시장 진출을 보장할것
등의 4개 선행조건을 제시하였다.

한편, 1965년 5월 16일 미국 방문길에 오른 박대통령은 17일과 18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국측은 1개 전투사단 파월을 전제로
①북한군 재침 시 미국의 즉각 개입 및 주한미군 계속주둔
②한국군 장비현대화
③군원이관 중단
④한,일협정 체결
⑤결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한 장기개발 차관
⑥한,일 국교정상화등 한국측 요구사항 대부분을 수용하였다.

전투부대 파병에 관하여 미국과 합의한 한국정부는
부대편성과 대미협상 등 본격적인 준비를 하면서 7월 2일 국무회의를 열어
1개 전투사단의 파견을 결정하였고,
이에대한 동의안이 1965년 7월 12일 국회에 상정되었다.

국회는 8월13일 야당의원들이 의원직 사퇴서 제출로 불참한 가운데
여당과 무소속 의원만으로 표결에붙여 찬성 101, 반대 1, 기권 2라는
압도적인 표차로 월남 증파안을 통과시켰다.
국방부와 육군본부는 몇 차례의 회의를 거듭한 끝에 파월부대로
제1야전군사령부가 선정해 보고한 제27사단 대신 전투서열 1위인
수도사단(맹호부대)으로 결정하고,
사단장에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채명신 소장(육사 5기)을 임명하였다.

★파 월 : 1965. 10. 16 부산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월남 퀴논에 상륙

★참전기간 : 1965. 9. 25 - 1973. 3. 7

★참전군인 : 114,902명 (장교 7,652명, 사병 107,340명)

★희 생 : 전사 2,111명 (장교 186명, 사병 1,925명)
부상 4,474명(장교 246명, 사병 4,228명)

★전 투 : 175,107회 (대부대 전투 521회,소부대전투 14,586회)

★대민사업 : 퀴논 지역에 문화센터, 학교건물, 공원 팔각정을 건축하는등
많은 대민지원사업을 벌였으며,
1972. 4. 18부터 5. 15까지 약 한달동안 파월 한국군이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안케패스 전투를 비롯하여
1966년 8월의 둑코작전, 월게작전, 돌풍작전, 맹호작전, 해산진작전등
수많은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둑코전투 승리는 월남전의 기적으로서 용맹성을 세계만방에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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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잡는해병 청룡부대

(해병 제2여단)

한편 해병대 사령부는 한국전쟁 당시 혁혁한 전과를 기록한
해병 제1사단 2연대를 파월부대로 선정하였다.
그런데 연락단 (단장 이세호 합참 전략정보국장)이
사전에 주월미군 및 월남군측과 교섭한 결과 육군은 퀴논(Qui Nhon) 지역에,
해병은 캄란(Cam Ranh)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할 것이라고 보고함에 따라
해병대의 규모를 연대에서 독립작전이 가능한 여단규모로 증편조정하고
여단장에는 해병대 사령부 관리국장
이봉출 준장(해병 특교대2기)을 임명하였다.
수도사단과 해병 제2여단 등 전투부대에 대한 파병이 결정되자
이들 부대에대한 군수지원을 위한 수도사단 예속으로
군수사령부를 창설(1965.9.1), 사령관에 이범준 준장(육사8기)이 임명되었다.
수도사단과 해병 제2여단의 파월로 주월한국군은
군사원조단을 포함하여 25,000여 명에 달하게 되어
이들 부대들을 통합지휘할 사령부의 편성이 불가피하였다.
이에 국방부일반명령 제16호로
1965년 9월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
사령관은 채명신 수도사단장이 겸무하도록 하였다.

제3차 파병부대인 수도사단과 제2해병여단은
1개월 정도의 교육훈련이 끝나자 3개 제대로 나뉘어 월남으로 출발을 하였다.
1965년 9월 16일 육군 283명과 해병 95명으로
편성된 선발대가 미 수송기 편으로 출국한데 이어 제1제대인 해병 제2여단은
9월 20일 포항에서 박대통령과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단식을 가진 후 10월 3일 부산항을 출항하여
9일 캄란에 도착하였고,
10월 12일에는 여의도기지(K-16)에서 박대통령 임석하에
수도사단에 대한 환송식이 거행되었으며
수도사단 제1연대가 주축이 된 제2제대는 10월 16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22일 퀴논에 도착하였으며,
기갑연대가 주축이된 제3제대는 26일 부산항을 출발하여 11월 1일 퀴논에
도착함으로써 제1차 전투부대의 파월이 완료되었다.

★파 월 : 1965. 9. 20 경북 포항에서 출범, 1965. 10. 3 한국을 떠나
1964. 10. 9 캄란에 상륙.

1967. 12. 12부터는 호이안에 주둔.

★사령관 : 이봉출 여단장의 뒤를 이어 김연상, 이동호, 이동용, 허홍 준장

★참전기간 : 1967. 12. 12 - 1972. 2. 24

★참전군인 : 37,340명 (장교 2,166명, 사병 35,174명)

★희 생 : 전사 1,202명 (장교 42명, 사병 1,160명)

부상 2,904명 (장교 99명, 사병 2,805명)

★전 투 : 151,522회 (대부대 전투 175회, 소부대 전투 151,347회)치열한
전투의 와중에서도 따이한로(지금은 남조선로라 불림)라고 불리는 다낭에서
호이안간의 도로건설과 많은 대민지원 사업을 실시하여
한월간 친선을 도모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1965. 11. 8부터 한달동안 벌인 번개 1, 2, 3호 작전을 비롯하여
짜빈동, 괴룡작전, 승룡작전, 황룡작전 등
많은 전투를 이끌어 참전 부대중 가장 용감한 부대로 평가를 받으며,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으로서 귀신잡는 해병의 맹위를 온 천하에 떨쳤다.
특히
1967. 2. 14일부터 15일까지
실시한 짜빈동 전투는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화중에 신화로써
한국 해병의 이미지를 부각하는데 큰 몫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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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동맥 십자성부대

(100군수 사령부)


★파 월 : 1965. 10. 12 여의도 광장에서 맹호부대와 같이 출범
1965. 10. 16 부산항 3부두를 출발,
1965. 10. 22 퀴논에 상륙,
맹호부대 사령부와 같이 퀴논 인접지역에 주둔.
출국 당시에는 군수지원 사령부였으나 1966. 6. 1 퀴논에서 부대명칭을
100군수 사령부로 개정.
1966. 8. 20 십자성 부대가 나트랑으로 이동하였다.

★사령관 : 초대 이범준 사령관에 이어 유학성, 이영일, 이창복, 김종달,
신유정 준장이 사령관을 맡아 부대를 지휘했다.

★참전기간 : 1965. 9. 25 - 1973. 3. 23

★참전군인 : 25.611명(장교 53명, 사병 599명)

★희 생 : 전사 213명(장교 26명, 사병 187명)
부상 439명(장교 27명, 사병 412명)

★전 투 : 106,665대의 차량수송과 396,019명의 병력수송 및
233,669동의 군수등 수송작전을 치루었다.
군수업무를 수행하면서 민사 심리전으로 베트공 마을을 찾아다니면서
환자 진료와 구호품을 전달하여,
전쟁의 적은 있어도 인류의 적은 없다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대민사업으로 학교, 사찰, 교회, 교량, 유치원 등을 설치해 주고 농사짓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어 한국의 혼을 심는데 크게 이바지 했다.
또한
한국군이 빛나는 전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난관을 극복하면서 적기 적소에 군수 지원을 원활히 수행한 지대한 공로로 평가한다.
그러므로 파월 한국군 부대의 동맥과 젖줄로 그 소임을 다해 온 십자성 부대는
어머니상으로 영원히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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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참전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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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사도 비둘기부대

(건설 지원단)


1964년 8월 2~4일에 발생한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월남에 대한 군사지원을 증가시키면서 압력수단으로
월맹을 폭격하였고,
이에 맞선 월맹은 미군장교숙소와 미공군기지를
공격하는 등 월맹군의 도발이 격화되자 미국은 월남에 대하여
종래의 소극적 지원에서 적극적인 대응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미국 (1964년 12월18일)은
우리정부에 국군의 추가 파병을 요청하였고, 월남정부 또한
1965년 1월 2일 국군의 2차 지원에 관한 공한을 우리정부에 보내왔다.

정부와 국방부는 미국과 월남의 2차 파병 요청에 따른 협의를 거쳐,
국군의 해외 추가파병에 대한 동의안이
1965년 1월 26일 제47회 임시국회 제7차 본회의에서 가결
(찬성106, 반대 11, 기권 8)되자, 국방부는 1월 29일
국방부 일반 명령 제5호로 강원도 현리에 위치한 제6사단에서
주월한국군사원조단 본부를 창설하여
평화를 상징하는 뜻의 '비둘기 부대'로 명명하고,
단장에 조문환 준장(육사7기)을 임명하였다.

1964. 7. 15 서울 창동에서 환송식을 갖고 출범한 비전투 부대,
제1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은
1964년 7월 28일 선발대로 하여 한국군이 부대로서는 최초로 파월된
비둘기 부대는
이름이 상징하듯이 의료진과 건설 공병으로 구성된 평화의 사도 전사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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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제왕 백구부대
(해군 수송부대)


하늘의 보라매 은마부대
(공군지원단)


제1 이동외과병원/태권도 교관단(1차 파병),

제1차 파월병력 140명은
국회의 동의를 얻은 후 1964년 9월11일 우리해군 LST편으로
부산항을 출항하여 22일 월남의 수도 사이공 항에 도착하였으며,
제1이동외과병원은 붕타우에 있는 월남 육군정양병원에 주둔하게 되었고,
태권도 교관단은 3개조로 나뉘어 육군사관학교, 해군사관학교,
육군보병학교에서 월남군을 지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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