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수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09-01-30 (금) 15:51
ㆍ조회: 2286  
IP: 222.xxx.80
짜빈동전투
적은 왜 11중대를 기습 공격해야만 했는가?/ 1

청룡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추라이 지역에서 적의 주요 공격 표적은
추라이 비행장과 청룡 포병 대대의 포 진지였다.
포진지에 접근하려면 우선 짜빈동 마을에 위치한 11중대를 필히 공격해야만 했다.

따라서 후에 밝혀진 것이지만 월맹군 1개연대는 단1시간만에 간단히 청룡11중대를
해치우고 청룡 포병 대대를 기습한후 추라이 미 공군기지를 공략코져 했던 것이다.
그러나 4시간에 걸친 청룡용사들의 혈투로 적은 지리 멸렬 후퇴하고 말았다.
만약 11중대가 적에의해 섬멸 되었더라면
한.미.월군은 적의 본격적인 대공세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11중대의 중대전술기지는 추라이 남쪽 쾅나이성 손틴군
짜빈동 마을 북쪽의 약 30m 높이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중대의 동쪽 1km 지점에는 한국군이 전력을 다해 방어하던
베트남 제1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었다.

중대의 북쪽 6km 지점에서 청룡부대 여단본부가 있었다.
11중대 진지가 위치한 지역은 당시 청룡부대 주둔지역의 서남쪽 모퉁이였다"




청룡 11중대의 기지는 남북으로는 300m이고 동서로는 200m 정도인 길쭉하게
찌그러진 타원형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남쪽과 북쪽에는 약간 높이 솟은 지형이 있었는데 이곳에 관측소를 설치하였다.
방석 중앙이 높이가 낮았으므로 중대 중심부에선 북쪽과 남쪽의 상황을 완전하게
파악할수 없었다.

이 기지 외곽에는 2중의 단선철조망과 5중의 원형철조망이 있었다.
대인지뢰는 140발,
크레모아 63발, 조명지뢰 38발이 매설되어 있었다.
진지와 진지 소대와 중대 사이에는 모두 교통호를 만들어
기지 내부의 교통호는 전체 길이가 800m에 달했다.
개인호의 절반 정도는 포탄에 견딜 수 있도록 유개호로 만들었으며
각 분대에 2개씩의 위장 진지를 만들어 적의 화력이 분산되도록 했다.


중대에는 중대 직할 병력 외에도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와
81밀리 박격포반 진지도 배치되어 있는 상태였다.
포병지원을 유도하기위해 포병 관측장교인 김세창중위(해간33기)도
11중대 방석 내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운명의 날인 1966년 2월14일 밤이 되었다.
3일만 더 버티면 한국 해병대가 선제공격을 감행하게 되는 상태였다.
적들의 움직임이 수상했지만 기껏해야 2개 대대급 공격쯤으로 예상했을뿐
설마 월맹 정규군 연대급을 초과하는 병력이
중대전술기지에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짜빈동 입구의 영웅 묘지말고도 현장에 사당이 지어져있다
"2월14일 밤 11시20분.거센 비바람 속에서 3소대 박기창 일병은 수풀을 헤치는 소리를 들었다.
이윽고 적이 철조망 파괴통으로 외곽 단선 철조망의 일부를 파괴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청음초는 즉각 중대로 적발견을 보고했고 중대는 조명탄을 발사하여 30여명의 적을 확인했다.
기지 서북쪽을 담당하고있던 11중대3소대는 맹렬한 사격을 가했으나 적은1명의 시체를 남긴체
금방 후퇴해 버렸다. 그런데 적은 그냥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떠들썩 하게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후퇴했다. 이와 동시에 기지 남쪽의 짜빈동 마을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11중대장 정경진 대위는 적의 이상한 행동으로 보아 완전 철수한 것이 아니고
다시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여 전 병력에게 군화를 벗지 못하게 지시하고,
1/2병력을 진지에 배치한 상태로 경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적은 다음날 새벽이 다되도록 공격해 오지 않았다.

초긴장 상태로 참호 속에 대기하던 병사들도 하나둘 졸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2월15일 새벽 4시10분, 3소대 청음초였던
도성룡 일병과 조정남 일병은 베트남 사람 특유의 고약한 체취를 느꼈다.
거의 동시에 잠에서 갑자기 깬
이중석 일병은 적을 보고 놀라서 소총을 발사해버렸다.




해병대는 포병관측장교 김세창 중위의 유도아래 105밀리 포대에서
조명탄을 발사하고 진지 외곽의 적부대 후속지점으로 차단사격을 실시했다.
적들은 4시20분부터 이곳저곳에서 철조망 파괴통을 이용하여 3소대 외곽의
철조망을 파괴했다.
이윽고 적의 박격포 지원사격이 끝났다.
잠시 정적이 흐른후 적들은 일제히 괴성을 지르면서 3소대 진지로 돌격해 왔다.




11중대 병사들은 소총으로 최후 저지사격을 펼쳤다.
그러나 3소대 전방으로 돌격하던 적은 무려 2개 대대 병력이었다.
결국 4시40분 무렵 11중대 3소대 1분대와 3소대 화기분대가 방어하던
기지 외곽이 적 2개 대대 병력에 의해 돌파를 당했다.
애당초 3소대 1분대 지역은 방어정면이 너무 넓어
3소대장이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11중대장에게
방어정면을 좁혀주도록 요청했으나 중대장이 묵살한 바 있었다.
결국 3소대 1분대의 방어망이 뚫려 중대 전체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11중대 3소대 1분대장 배장춘 하사는 총과 무전기를 버리고
곡괭이를 집어 들고 백병전에 뛰어들었다.
1분대 이학현 상병은 적병 5명이 참호로 돌입한 후 어둠 속에서
헤매다가 중대 대변수집통으로 빠져버리자 대변수집통에 수류탄을
던져 적 5명을 대변통 속에서 폭사시켰다.

이학현 상병은 배장춘 하사에게 달려드는 적을 죽인 후
오른쪽 발목과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개인호에 뛰어든 적병과 싸우던 조정남 일병은
중과부적으로 밀리자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했다.


부상속에서도 계속 사격하던 이학현상병도 개인호속으로 적이뛰어들자
수류탄을 터뜨려 적들과 함께 자폭해 버렸다.
김명덕 일병은 전신에 파편상을 입은 상태에서 수류탄을 모아 적들에게
계속 투척 했다.
이영복 일병은 부상당한 배장춘 하사를 부축하여 2소대 진지로 후퇴했다.
이영복 일병을 제외하면 나머지 1분대원 전원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같은 시간은 3소대 화기분대도 돌파를 당했다.
사수 김낙성(김남석) 상병이 전사한 후에는 ~ 부사수 이내수 일병이,
그 다음에는 1번탄약수 오태준일병 마지막으로 송영섭일병이 경기관총을
넘겨받아 최후까지 사격했으나 결국 화기분대도 돌파 당하고 말았다.
송영섭일병은 마지막 순간 기관총 총열을뽑아 물구덩이로 집어던지고 전사했다.

11중대에 배속된 1중대 3소대 소속 병력들도 철조망용 철주를 뽑아들고
백병전으로
적을 상대했다.
11중대 3소대 외곽 방어망을 돌파한 적들은
화염 방사기 3문을 앞세우고 내곽 방어망으로 안쪽으로 돌진해 왔다"




츄라이 전선의 154기 남상숙 선배님
"11중대장 정경진대위는 3소대에게 기지 외곽방어망을 포기하고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어차피 방어가 뚫린상태에서 현 위치에서
무리하게 방어를 펴기보다는 병력을 집결한후 집중 반격하는것이
더 좋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모험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이 결단이 진지 방어에 결정적 전기가 되었다.


적들은 해병 청룡부대와 유사한 철모와 위장복을 착용하고 있었으므로
진지 안에서 병력이 뒤섞이자 피아를 구별할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적은 평소 한국군이 기지 밖에서 매복작전을 할 때 수풀로
위장한 것을 보고 한국군을 흉내 내기 위해 수풀로 위장을 하고 있었다.
피아를 구별하기 위해 고심하던 정경진 대위는 적이 수풀로 위장한것을
인식하고 풀이나 나뭇가지를 꽂은 병사는 적이니 사살하라고 지시했다.
한국군은 기지 내에서는 수풀 위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0여년이 흘렀건만 아직도 풀한 포기 나지않는 곳이 있다
"11중대 1소대가 위치한 지역에는 적1개대대가 공격해왔다.
이곳의 적 1개 대대는 직접 방어망을 돌파하는 것이 임무라기보다는
11중대 3소대 지역으로 1소대가 지원을 못하게 견제공격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대대vs소대간의 병력 차이가 컸으므로 1소대의 외곽방어망 중의
한곳도 결국 뚫리게 되었다. 적은 철조망 파괴통을 이용하여 1소대의
철조망을 7m 정도 파괴하였다. 3소대가 외곽방어망을 포기하고 후퇴할
무렵 1소대도 진지 안에서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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