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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하웅
작성일 2004-12-14 (화) 22:59
ㆍ조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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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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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2월호 
        
위대한 세대의 증언 (7) - 새나라자동차·워커힐 호텔·합판산업 일으킨 艾壽根의 1960년대
 
『나는 당신들이 싫어하는 군사독재下에서, 밀림의 원목을 자르고 전쟁터를 누비며 달러를 벌었다』
 
●『「朴正熙 대통령이 워커힐 호텔에 놀러가기 편하라고 삼일고가도로를 닦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있다. 외국 관광객 유치하려고 길을 닦았다』
● 인도네시아 정글에서 원목을 채취, 세계 최고 합판생산국의 길을 열었다.
●『베트남에서 한국경제가 일어섰다』 그곳에서 만난 鄭世永·鄭仁永·趙重勳 이야기


艾 壽 根
1926년 경기도 용인 출생. 연세大 경영학과·샌프란시스코大 경제학과 졸업. 6·25 참전용사. 美 7사단 소속으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여. 중앙정보부 경제개발팀 기획관리과장, 美 산호세 텔레비디오 사장, 美 코암투자회사 사장, 日 마르베니 종합상사 고문, 홍콩 코암투자회사 대표이사, 아시아 태평양연구소 고문, 한국선물주식회사 회장, 한국선물협의회 회장 역임. KBS 「경제전망대」에서 5년간 국제금융해설.
李根美 자유기고가 (gosus@dreamwiz.com
즉흥적이었지만 순수했다
 여의도 63빌딩 59층에서 내려다보는 서울은 경이롭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고층빌딩과 낙엽지는 숲이 잘 어우러져 몹시 풍요로워 보인다. 艾壽根(애수근·78)씨는 『50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며 『여의도의 오늘에는 나의 땀방울도 보태졌다』며 감회에 젖었다.
 
  艾壽根씨는 『개발연대에 많은 일들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이해관계 없이 순수하게 진행됐다』고 했다.
 
  무역회사 부장이었던 艾壽根씨는 1958년 무렵부터 영관장교였던 石正善(석정선)씨와 친분을 맺어 왔다. 艾씨는 1961년 7월, 중앙정보부에 몸담은 石正善씨의 요청으로 국가재건 최고회의 경제개발팀 기획관리과장을 맡았다.
 
  국내에서는 새나라자동차 설립, 워커힐 건설 등의 일에 참여했다.
 
  해외에서는 인도네시아 원목 채취에 이어, 베트남 해외개발공사 동남아지국장을 맡아 국내 기술요원 송출 사업에 나섰다. 196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국제금융업에 종사했고, 그후 캘리포니아州의 실리콘밸리에 있는 텔레비디오 회사 사장을 지냈다.
 
  1989년에 귀국해 한국선물거래주식회사와 선물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건강이 나빠져 1996년에 다시 미국으로 갔다가 2003년 3월에 영구 귀국했다.
 
  그는 개발연대의 문을 열었다는 데 자부심이 대단했다.
 
  『피터 드러커가 「산업혁명 후 가장 짧은 기간에 발전한 건 한국」이라고 했어요. 한국이 朴正熙 대통령 집권 18년 만에 근대화를 달성했는데, 그 18년은 다른 나라와 다릅니다. 다른 나라는 지식기반이 나름대로 있었지만, 日帝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국은 지식 기반이 빈약했어요. 18년 동안 한편으로는 교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발전했죠.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시작한 겁니다』
 
 
  GNP 80달러에서 시작한 자동차 산업
 
  민간인이었던 艾壽根씨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발탁한 石正善씨는 李承晩 정부 때 整軍(정군)운동으로 전역했다가, 5·16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일했다. 艾씨와 비슷한 시기인 1969년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서 사업을 하다가 은퇴했다. 1년에 한두 번 고국을 찾는데 그때마다 艾壽根씨와 만나 회포를 푼다고 한다.
 
  金鍾泌씨와 石正善씨는 육사 8기 동기생으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石正善씨는 5·16에 참여하지 않았다. 거사에 성공하자 金鍾泌씨가 바로 石正善씨를 영입했다.
 
  5·16 이후 朴正熙 대통령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분야는 자동차 사업이었다고 한다.
 
  자동차 산업의 파급효과를 알고, 미국·일본·독일의 자동차 회사를 찾아가 기술 이전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韓日회담을 할 때 우리 정부가 일본에 기술이전을 부탁하자, 일본에서 「내수용을 만들 거냐, 수출용을 만들 거냐」, 「버스를 만들 거냐, 승용차를 만들 거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우리 협상대표단이 「지프차나 스리 쿼터 같은 걸 만들어서 군대에서 쓰려고 한다」고 했어요. 괜히 승용차를 만들어서 해외에 판다고 하면 기술이전을 안 해 줄 것 같아서였죠. 일본이 기술을 이전해 줬어요. GNP 80달러밖에 안 되는 나라니 가르쳐 줘도 별 상관없을 거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자동차 산업을 시작하려고 했지만, 국내에 참여하려는 기업이 없었다. 在日교포 박노정씨가 초창기에 참여했으나 자금부족으로 도중하차했다. 정부가 직접 한일은행의 자금을 빌려 「새나라자동차」 공장을 지었다.
 
  육군 병기감 출신 소병기 장군이 사장, 在日교포 안석규씨가 전무로 취임하고 艾壽根씨는 정부에서 파견 나가 기획과 구매책임을 맡았다.
 
 
  「시발 자동차」 망한다고 자동차 산업 반대
 
  『국내에서도 안 될 거라며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당시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드럼통을 두들겨서 고물 엔진을 단 「시발」이라는 자동차가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자동차 산업을 시작하면 시발차가 망하게 된다고 반발이 많았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얘기죠』
 
  당시 우리의 자동차 보유대수는 7만 대. 군대 트럭까지 다 합친 수였다.
 
  군사혁명정부는 1961년 8월15일까지 자동차를 만들어 내기로 결정했다.
 
  『金鍾泌씨가 상공부 관계자를 불러서 자동차를 만들라고 하면 「예, 예」 하고 대답하고 돌아가서는 아무 소식이 없어요. 신문에서는 「돈이 어디서 나와서 자동차를 만드느냐」고 야단이었어요. 어쨌든 8월15일에 자동차가 나왔어요. 일본에서 부속을 수입해서 조립만 한 거죠. 그렇게 밀어붙이지 않았으면 자동차 산업을 시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일제 부속품을 조립한 자동차이기는 하지만 「새나라자동차」라는 이름의 국산 자동차가 탄생했다. 당시 한국은 가구 하나 변변히 생산하지 못할 때였다. 艾씨는 『5·16 전에 우리나라가 가진 기술은 리어카 만들고, 미군부대에서 나온 드럼통을 두들겨서 고물 엔진을 단 시발택시와 버스를 만드는 정도였다』고 했다. 새나라자동차에 들어간 국산품 가운데 품질기준을 통과한 것은 한국타이어가 유일했다고 한다.
 
  급하게 만든 만큼 「새나라자동차」는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택시 운전사들은 『국산 시트의 스프링이 전부 끊어져서, 손님들의 엉덩이를 찌른다』고 항의를 했다. 하지만 많은 국민들이 국산 자동차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艾씨는 『국산 자동차를 생산했기 때문에 朴正熙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를 만들 결심을 했다』며 『중화학공업도 자동차 산업이 출발했기 때문에 꿈꾸게 된 것』이라고 했다.
 
  새나라자동차는 3년 후 신진자동차 김창환 사장에게 넘어갔고, 정부는 한일은행의 빚을 다 갚았다. 신진자동차가 나중에 대우자동차가 되었고, 현재의 GM대우로 이어지고 있다.
 
 
  달러 벌기 위해 워커힐 호텔 건축
 
  자동차 산업과 함께 혁명정부가 초기에 벌인 사업이 워커힐 호텔 건축이다.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美 8軍 부사령관 멜로이 장군이었다.
 
  멜로이 장군은 1961년 10월 혁명정부의 실력자 金鍾泌씨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혁명정부가 성공하려면 경제를 안정시키고, 산업을 근대화해야 한다. 빨리 韓日국교정상화를 추진하고, 경제개발에 주력하라. 駐韓美軍이 7만5000명인데 이 사람들이 전부 휴가를 일본으로 간다. 美軍들을 비행기로 일본까지 보내줘야 하니 돈이 많이 든다. 한국에 좋은 휴양시설만 있으면 미군 장병들의 절반은 한국에서 휴가를 보낼 거다. 호텔을 열면 1년이면 1억 달러 정도는 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국의 수출품은 인삼·오징어·김·生豚(생돈), 텅스텐이었고, 수출액은 1000만 달러가 안 될 때였다.
 
  얼마 후 朴대통령이 金鍾泌씨 등과 워커힐 꼭대기에 있는 李承晩 대통령의 여름별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朴대통령이 『여기 경치가 좋은데 뭘 하면 좋겠는가』라고 물었다. 金鍾泌씨는 『국제 수준의 호텔을 지어서 처음 2∼3년은 美軍을 유치해 외화를 벌고, 그 다음에 국제관광대회 열어 달러를 벌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곧바로 워커힐 호텔을 짓기로 결정했다.
 
  우선 뛰어난 건축가들을 수소문해서 모았다. 후일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金重業씨, 세종문화회관을 설계한 엄동문씨,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을 설계한 金壽根씨, 서울大 김희춘 교수, 건축설계가 나상진·이희태씨, 홍익大 강명구 교수가 그들이다.
 
  대부분 일본·미국·독일 등지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지만, 그때까지 한국에서 5층 이상 건물의 설계를 해볼 기회가 없었다. 艾壽根씨는 이들을 인솔하고 해외의 유명 리조트들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워커힐 호텔은 모두 30棟(동)으로 구성됐는데 국내 건설회사 30군데에 한 棟씩 건축을 맡겼다.
 
  『「한국에서 처음 짓는 국제적 대형 호텔이니 엉터리로 짓지 말라, 잘 지으면 제2, 제3의 호텔을 지을 때 특별히 배려하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건설회사 사장들이 직접 나와서 감독을 했어요. 현대 鄭周永 회장, 삼환 崔鍾煥 회장을 비롯해 여러 회사 대표들이 매일 나왔습니다. 건설회사에서도 이윤을 안 남기고 실비로 지었어요. 그때 타일과 대형 유리 등 모든 원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해 왔어요』
 
 
  워커힐 개관 행사에 루이 암스트롱 초청
 
  10개월 만에 호텔 공사를 끝냈으니 대단한 「속도」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집에 가고, 사흘에 한 번씩 공중목욕탕에 가서 씻으면서 견뎠죠. 겨울에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데도 집에 안 가고 현장에서 천막을 치고 잤습니다. 그런데도 모두들 신이 나서 했어요. 私心 없이 그냥 모두들 잘살아보겠다는 일념에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공사현장에서 실무를 본 사람들이 모두 군인들이었어요. 공군·육군·특전대·공병장교 등이 와서 일했죠. 심지어 육군형무소에 투옥되었던 군인들이 나와서 낮에 도로를 닦았어요』
 
  艾씨는 당시 누군가에게서 『루이 암스트롱을 초청하면 기자가 자동적으로 수백 명이나 따라온다』는 얘기를 들었다. 주한미군과 美 대사관 쪽에 루이 암스트롱 訪韓을 집요하게 요청했다. 루이 암스트롱은 자가용 비행기에 기자들을 몰고 와서 세계에 워커힐 호텔을 알려줬다. 최초로 「라스베이거스 미인 쇼」를 초청했다.
 
  워커힐 호텔을 완공한 뒤 외국인만 싣고 다니는 택시 300대를 운행했다. 1년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었다. 워커힐 호텔을 개관한 지 3년 만에 공사비를 다 벌어들였다. 艾壽根씨는 『어떤 이가 「朴대통령이 워커힐 호텔에 드나들려고 청계고가도로를 만들었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책에다 썼던데, 외화를 벌기 위해서 만든 도로입니다. 왜 그런 한심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艾壽根씨는 『예산도 없고 기술도 기술자도 없는데 자동차 공장과 워커힐 호텔을 만들었다』며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했나 싶다』고 했다.
 
 
  『4大의혹 사건은 反JP 세력의 합작품』
 
  새나라자동차 설립과 워커힐 호텔 건설을 중앙정보부가 주도하자, 야당의 반대가 거셌다.
 
  金泳三·金大中·柳珍山씨 등 야당 인사들과 尹潽善씨는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무슨 자동차냐』, 『달러도 한 푼 없는데 무슨 워커힐 호텔이냐』고 공격했다. 공화당 안에서도 저돌적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중앙정보부에 대해 견제가 많았고, 金鍾泌씨를 반대하는 「反金세력」이 형성됐다.
 
  새나라자동차, 워커힐 호텔과 함께 증권, 슬롯머신을 묶은 「4大의혹」 사건이 터졌다. 金鍾泌씨는 외유에 나서고, 石正善씨는 구속되었다. 구속 이유는 자동차 산업과 워커힐 호텔 조성 사업을 통해 빼돌린 돈이 공화당 창당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艾壽根씨는 『뒤로 빼돌릴 돈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돈을 빼내려야 빼낼 도리가 없었어요. 그럴 생각들도 안 했고요. 내가 구매과장으로 일했지만 어디서 일전 한 푼 받은 게 없었어요. 石국장이 감옥에 있을 때 제 아내가 그 댁에 쌀 한 말하고 공책 다섯 권을 갖다 줬어요. 우리도 뭐가 있어야 많이 갖다 주죠. 나도 조사를 받았지만, 뭐 하나 착복한 게 없으니 집어넣을 수가 없었어요』
 
  한 달이 조금 지나서 石正善씨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艾씨는 이렇게 주장했다.
 
  『4大의혹 사건은 여당 안의 金鍾泌씨 라이벌과 야당이 합작으로 만든 사건입니다. 요즘도 가끔 4大의혹 사건 얘기가 나오는데 정치적으로 이용한 겁니다』
 
  워커힐 호텔 공사를 기획하고 지휘한 金鍾泌씨와 石正善씨는 1963년 3월에 열린 워커힐 완공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한 달 남짓 만에 풀려 나온 石正善씨는 중앙정보부를 그만두게 되었다. 
  
  
 


211.186.108.100 손 동인: 김하웅회장님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항상혼자서 고생하시는 회장님의 마음 내색은 안하지만 모든전우님들 가슴깊히 새기고 있읍니다.건강하십시요 회장님^^& -[12/15-21:47]-
61.74.206.124 박동빈: 회장님 정말 좋은 글 올려주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12/17-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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