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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현태        
작성일 2004-01-30 (금) 22:57
ㆍ조회: 150  
죽도 관광

실패한 꿈일지라도 아름다웠으니…

진안 죽도와 천반산

어린 시절 사회과 부도를 펴놓고 친구들과 지명찾기 놀이를 할 때면 내륙에 있으면서도 ‘-도’자가 붙은 곳을 문제로 내곤 했다. 그러면 거개 바다 언저리에서 찾느라 엉뚱한 곳을 헤매기 십상이었다.
죽도竹島 역시 그런 곳. 이름에 섬도島자가 붙었지만 바다에 있는 섬은 아니다. 산 첩첩한 진안군 진안읍 가막리에 있다. 물이 굽이굽이 죽도를 감싸안고 휘돌아 죽도는 육지에 있으면서도 섬이었다.

“옛날 죽도는 참 좋았제.”
죽도 근처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은 죽도 이야기를 꺼내면 대부분 ‘서두’가 그랬다.
과연, 옛날 죽도는 어쨌길래? 아무리 궁금해도 ‘옛날 죽도’는 이제 가볼 수 없으니 다만 ‘지금의 죽도’를 가볼 뿐이다. ‘옛날’과 ‘지금’을 가르는 경계는 용담댐이 만들어지기 전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선 산이 발파돼 끊겨 인공적으로 폭포가 생기기 전이다.
어디 먼 곳에 갑자기 뚝 떨어진 것마냥 죽도의 풍경은 비현실적이다. 수십 길 벼랑이 쩌억하니 갈라져 서로를 마주보고 있고 그 아래로 물이 흐른다. 절벽의 위세만으로도 압도될 만 한데 오른쪽 절벽위 실루엣이 뚜렷한 소나무 한 그루는 이 풍경에 ‘화룡점정’이다.
절벽 가까이 가본다. 물소리가 귀에 달겨들 듯 소란하다. 절벽사이 수직의 벽에 폭포가 흐른다. 흘러온 물이 이 곳에서 급강하하면서 세를 과시하는 것이다.

‘사연’을 알고 보면 풍경은 아름답다기보다 거대한 상처 같다. 수려한 바위산 절벽을 맑은 물이 휘돌아 흘러 마치 섬과 같았던 곳. 동쪽 무주 덕유산 쪽에서 흘러오던 구량천이 상죽도와 하죽도를 감싸고 휘어져 돌며 하죽도 끄트머리에서 남쪽 장수에서 흘러오는 연평천과 합수合水해 흘러갔다. 그것이 예전의 죽도 풍경.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 물줄기 일부를 돌려 논을 만들려고 병풍바위(혹은 벼슬바위로도 불린다) 중간을 폭파하여 지금의 폭포가 만들어졌다. 이로 인해 구량천이 곧바로 폭포 아래로 흘러가게 되면서 물길이 바뀌어 죽도를 돌아 흐르지 않게 되었다.
동향면 장전마을에 사는 송상진씨는 “오래 됐제. 물길을 돌려 논 맹글라고 산을 발파했어. 처음에 논 만들라 했던 사람이 실패하고 몇 사람이 그 후로 또 달라들었지만 다 손 떼고 가 버렸제. 예전엔 여그 물이 그렇게 맑고 대사리도 많고 쏘가리 누치 꺽지 퉁사리 같은 물고기들도 겁나게 많았는디 폭포가 생겨논께 고기들을 통 볼 수가 없어”라고 말한다. “그 때는 논이 최고였응께 그랬겄제”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 끊어진 절벽 때문에 장전마을 사람들은 ‘혈맥이 끊겼다’고 말한다. 사람 욕심 때문에 변해가는 자연산천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죽도는 용담댐 공사로 지금은 마을이 없어지고 빈터만 남았다.

살던 자리를 잃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죽도 가막천에 자리해 있던 용바위도 그렇다. 용바위가 겪은 수난들은 인간사의 굴절을 그대로 담고 있다. 지난 98년 12월 음식점을 하던 이가 장식용으로 쓸려고 포크레인까지 동원해 몰래 옮겨간 것이 수난의 첫번째. 그러나 용바위가 워낙 독특하게 생긴 바위인지라 아는 사람들 눈에 띄어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기서 용바위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용담댐으로 만수위가 되면 어차피 물에 잠긴다는 이유로 2001년 상전면 일부 주민들이 상전망향동산으로 옮겨놓은 것. 이로 인해 상전면과 가막리 주민들간에 용바위를 놓고 소유권 갈등까지 일기도 했다. 용바위는 ‘용’이란 이름 그대로 물에 들었다 나왔다 하는 게 더욱 제 격이며 더구나 만수위가 되는 일 자체가 드물기 때문에 본래 자리에 놓아둬야 한다는 것이 가막리 주민들의 주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 용바위는 망향동산에 제 몸을 의탁하고 있다. 본래 있던 곳과 그 물을 떠나 울타리에 둘러싸여 덩그러니 ‘전시물’이 된 게 못내 어색하고 서글퍼 보이는 표정이다.

죽도까지 와선 그 옆 천반산을 휘이 쳐다만 보고 가면 서운할 일. 진안군 진안읍, 상전면과 장수군 천천면 경계를 이루는 천반산天盤山(647m)은 주능선 일원이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단 설과, 땅에는 천반天盤, 지반地盤, 인반人盤 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는데 이 산에 천반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 등이 있다.
죽도와 더불어 천반산은 정여립(1546∼1589)의 생애의 자취가 담긴 곳이다. 한 때는 ‘반역’이란 딱지를 붙인 채 ‘불온시’되던 이름. 하지만 그것은 그 시대가 덧씌운 굴레일 뿐. 역사가 늘 새롭게 해석되듯 그 이름은 정당한 복권을 기다리고 있다. 죽도와 천반산에 담겼던 정여립의 꿈은 무엇일까.

층층절벽으로 외곽이 성벽처럼 에워싸인 천반산. 안에 들지 않고 밖에서 보기만 해도 험준해 보이는 산세다. 동향면 장전마을 휴양림식당에서 오르면, 깃대봉과 마당바위, 성터를 지나 송판서굴을 둘러본 다음 뜀바위를 거쳐 죽도에 닿을 수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인 깃대봉까지 오르는 길은 마을 할머니가 일러준 것처럼 “가랑텡이를 쫘아짝 찢어서 올라야 하는 깔끄막진 길이어서 대근하다(몹시 힘들다)”. 오를수록 이 곳이 ‘천연의 요새’임을 실감케 된다. 위로는 바위들이 험준하고 아래로는 물이 굽이굽이 돌아 사람의 발길을 차단하고 있다. 산 첩첩 물 굽이굽이. 무주 장수와 더불어 ‘무진장’으로 불렸던 진안의 진면모가 절로 느껴진다. 저 멀리 아스라하게 마이산의 ‘두 귀’가 ‘쫑긋’솟은 모양을 정말 ‘귀여운 사이즈’로 볼 수 있는 것도 천반산 산행이 안겨주는 예기치 않은 즐거운 덤.

정여립의 흔적과 발자취는 산 곳곳에 남겨져 있다. 정여립이 성터와 망루로 사용하던 한림대터, 그가 말을 타고 뛰어다녔다는 뜀바위 등이 남아 있고, 능선에는 군사를 훈련할 때 돌로 성을 쌓은 흔적, 두 개의 윷판이 새겨진 평평한 말 안장 모양의 마당바위 등등이 있다. 성터의 너른 평지에서도 돌무더기의 흔적은 쉽게 발견된다. 송판서굴도 꼭 들러봐야 할 곳. 세조의 왕위찬탈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송판서가 은거해 수도했다는 굴이다. 그냥 굴이었으면 무슨 재밀까. ‘이야기’가 담겨 있으니 눈길 한 번, 마음 한 번이라도 더 주게 된다. 햇볕 짱짱한 날인데도 그 곳에 드니 서늘하고 축축한 기운이 느껴진다. 물이 귀한 산이건만 바위 틈으로 물도 흘러 옹달샘을 이루고 있다. 송판서는 당시 ‘은거’생활을 했지만 결국 생애의 뜻이 담긴 ‘송판서굴’이란 이름을 두고두고 남기고 있는 셈이다. 이 송판서굴에도 정여립이 머물렀다 한다.
정여립은 조선조 최대옥사라 할 수 있는 기축옥사의 중심축에 선 인물. 조선의 4대옥사보다 더 많은 1천여명이라는 막대한 희생자를 내었던 것이 선조 22년(1589년)의 기축옥사다. 호남땅을 반역향으로 새삼 배척하게끔 만든 사건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창조 교수는 반역이란 말이 가진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반역의 땅이란 게 결코 나쁜 땅이 아니다. 지배계층의 입장에서 맞지 않는 땅일 뿐이다”고 말이다.



패배한 자의 꿈은 늘 올바로 평가받지 못했다. 정여립도 그런 인물인지 모른다. 전주 태생인 정여립은 수찬이란 벼슬에 올랐으나, 선조와 서인들의 미움을 사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 직업적 차별이나 반상의 귀천, 남녀의 차별이 없는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모악산 앞 제비산(현재의 김제시 금구면)에 머물면서 죽도에다 시설을 지어놓고 천반산에서 군사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정여립의 진보적 사상은 ‘천하는 공물公物’이란 말에 집약돼 있다. “천하의 주인이 어찌 군주이겠는가, 이 나라 이 땅의 주인은 만백성이 아니겠는가”란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당대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서 왕조 봉건계급을 부정하고 민중의 평등을 이야기했던 것. 그는 선조 22년 역모로 몰리자 죽도로 피신했다가 관군에 쫓겨 천반산에서 자결했다고 전해져 왔다. 그러나 『동서만록』에는 자살은 조작된 것일 뿐, 정여립은 천반산 아래 죽도를 자주 찾았으며(그래서 그는 ‘죽도 선생’으로 불리기도 했다) 더욱이 역적도 아니었기 때문에 평소와 다름없이 죽도에 갔다가 관군에게 잡혀 죽은 것이라 기록돼 있다.
천반산에는 큰 돌솥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정여립과 대동계원들이 썼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크든지 솥전 난간으로 젊은 장정들이 뛰어다녔다는 전설이 함께 전해지는 돌솥이다. 그 돌솥의 존재를 확고하게 믿고 있는 장전마을 박치훈(72) 할아버지는 “20년 전 오천만원인가 겁나게 많은 돈 주고 그 돌솥을 찾는다 해서 사람들이 몰려 갖고 돌솥을 찾으러 갔는데 결국은 못 찾았다”는 말을 하며 “본 사람들이 있어. 세월 지나 그 사람들이 다 죽어 불고 돌솥도 어딘가에 묻혀 부러서 그렇제”라고 덧붙인다. 눈앞에 실재하지는 않지만 ‘어딘가 있다’는 믿음만으로도 그 지나간 역사와 사람들은 성큼 가까워지는 기분이다.
역사와 시대와 변해가는 사람살이가 다 얽혀 있는 죽도와 천반산. 그 곳에 남겨진 정여립의 생애에선 ‘실패한 꿈’ ‘미완의 꿈’이 떠올려진다. 하지만 그 ‘꿈’에 담긴 ‘깊고 큰 바람’만으로도 후세 사람들에게 의미 있으니, 그의 꿈을 현실에서 ‘실패한 꿈’이 아니라, 이상에서는 결코 패배하지 않았던 ‘불패의 꿈’이라 고쳐 말해야 하지 않을까.

가는 길: 진안읍에서 무주 방면-상전면 내송마을-동향면 장전마을-죽도와 천반산. 동향면 장전마을 버스정류장 조금 못 미쳐 오른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면 죽도. 도보로 30여분. 차의 경우 사륜구동차만 들어갈 수 있다. 천반산 산행은 동향면 장전마을 버스정류장 지나 ‘천반산휴양림식당’(063-432-7366)에서 시작하거나, 진안읍 가막리 혹은 천천면 연평리 신기마을에서 시작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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