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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박동빈        
작성일 2004-11-06 (토) 12:11
ㆍ조회: 75  
고엽제 참전용사의 고뇌(펌)

고엽제 참전용사의 고뇌  

이 수기는 vietvet.co.kr 의 살아가는 이야기에 올려진 글로써 많은 월남전 참전용사의 심금을 울린 내용이라 다시 이곳 게시판에 옮깁니다. 많은 격려의 댓글 부탁드립니다.

No, 1852
이름:문재팔 (moonjaipal@hanmail.net) ( 남 )
2004/11/3(수) 13:53 (MSIE6.0,Windows98) 218.149.55.34 1024x768
조회:166
나와 월남전 그리고 고엽제  

  

  나는 농촌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어릴 때 지게를 지고 3-4십리 산길을 넘어 다니며 땔나무도해 보았고 여름이면 뙤약볕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땀과 함께 보리타작은 물론 아버지를 따라 논바닥에 엎드려 김도 매보았으며 가뭄에는 두레질도 해야만 했습니다.


  보리타작을 할 때면 땀에 젖은 어린내 몸 동아리에 부서진 보리까락들이 달라붙어 금방불이라도 날것처럼 후끈거렸고 논고랑에 엎드려 만드리(마지막)김을 맬 때면 아버지의 등허리만 보였지 내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까칠까칠한 벼 포기의 잔털에 스친 내 양쪽팔뚝은 벌겋게 부어올라 그 쓰라림 말 할 수 없었고요 조금 더 커서 아버지와 같이 두레질(논에 물을 퍼 올리는 일)할 때는 힘에 균형이 잘 맞지 않아 뒤뚱거리다가 쏟아 붓기일 수였으며 허리는 끊어질 듯이 아파왔고 휘청거리는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만 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교육이라야 초등학교 두 번 중학교를 18살이 되도록 두 번 다녔던 것이 내 학력의 전부였습니다. 기술이라도 하나 배우자싶어 직업보도원에도 들어가 보았으나 내가 할 짓은 못된다며 너무도 쉽게 포기해버리고 빈둥대다가 차라리 군대나 가자하고 1962년도 스물 살이 되던 해에 해병대에 지원입대 하였습니다.


  12주 동안의 고된 신병훈련마치고 실무에 올라와 팔린 곳이 소총소대 소총수로

  “땀을 많이 흘린 군대는 실전(實戰)에서 피를 적게 흘린다.”

는 구호아래 날마다 하는 일이라곤 각개전투와 총검술이 일과였습니다.

  틈틈이 하는 상륙훈련에는 으레 높은 사람들이 지휘본부 관측소에서 쌍안경으로 우리들의 훈련모습을 지켜보고 있다하였으며 우리는 또 훈련이 끝난 뒤 지적받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은폐와 엄폐를 이용한 소이동과 포복으로 산 능선을 작업복이 다 헤지도록 기어야만 했습니다.


  그래도 하루 세끼는 거르지 않고 얻어먹을 수 있다는 것이 나로서는 다행이었으며 나뭇짐을 지고 산길에서 혼자 뒤쳐지지 않으려고 애써 어른들을 따라 산을 넘어올 때의 가슴이 터질 듯 한 고통과 뙤약볕에서 보리타작하고 김매며 두레질하던 괴로움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작대기 계급 3개를 달면서 제대해보았자 배운 것 없으니 마땅히 취직할 곳도 없다는 자책(自責)과 물려받아 농사지을 땅도 없다는 두려움에서 오직 달련된 몸 동아리 하나 믿고 남들이 흔히 말하는 군(軍)에서 말뚝이나 박자하고 1964년도 하사관학교에 입교해 직업군인이 되었습니다.


  1965년도 육군통신학교 의탁교육마치고 사단에 원대복귀 하였더니 때마침 월남에 파병될 부대로 제2연대가 선정되어 청룡여단으로 증편되면서 나도 근무중대에 편성돼 선발대로 우리해군 수송함인 LST에 장비들을 탑재하고 본진보다 10여일 먼저 출항하여 9일 동안의 항해 끝에 캄란(Cam Ranh)만에 상륙해 미군들의 대환영을 받으면서 월남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얼마간 주둔하다가 프로펠러가 4개 달린 커다란 수송기에 1개 소대씩 나누워 탑승하고 북쪽으로 120km떨어진 투이호아(Tuy Hoa)로 이동하여 어느 모래흙 밭에 벙커를 구축하고 야전천막의 사무실에서 통신보급하사관으로 귀국할 때 까지 근무하였습니다만 어디서 그런 용기들이 솟았는지 이홀 몸 하나 전사하더라도 생에 대한 미련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런 각오와 결심은 내가 고국을 떠나기 전에 이미다짐하고 또 다짐하였기에 하나도 두렵지 않았으며 그저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놓고 오금 조이시는 부모님께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위로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습니다.


  열대지방의 지독한 모기떼가 몰려들었지만 뙤약볕에서 보리까락에 긁히고 벼 포기사이를 헤집고 김을 매며 단련된 검고 단단한 내 피부조직은 쉽게 뚫을 수가 없었던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곱게 자란 전우들의 피부에는 마치 무슨 만찬장이라도 되는 양 떼로 몰려들어 벌겋게 부어오르고 가려워서 고역을 치러야 했는데 그런 체질의 전우들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귀국하여 2년 후에는 진급도하였고 마음씨고운 아내를 만나 결혼도할 수 있었으며 떡두꺼비 같은 아들도 낳아 고놈이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1970년도 나는 또다시 두 번째 월남에 가게 되었습니다.


  다낭(Da Nang)항에 도착하자 우리가 내린 배에 승선하기위해 대기하고 있던 귀국 장병들의 새까만 얼굴에서 유난히도 반짝이는 눈빛들이 섬뜩한 살기마저 서려있다는 걸 느끼며 나는 벌써 4년 전에 저들과 똑같은 경험을 했는데도 새삼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호이안(Hoi An) 여단본부에서 3대대 9중대로 배속 받아 헬리콥터를 타고 간 그곳은 내가가기 1년 전만해도 베트콩들의 훈련소와 의료시설은 물론 부비트랩 제조창까지 있었던 적에 은거지로 여단규모의 대작전 끝에 아군의 교두보(橋頭堡)를 마련하기위하여 증강된 1개 중대를 배치시켜 주둔하고 있는 베리야 반도(半島)라는 곳으로 월남전사상 유일하게 상륙작전을 감행했던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전임자에게서 통신반장의 임무를 인수받았습니다.

  일차 때의 AN/PRC-10의 무전기는 신형인 AN/PRC-25로 모두가 교체되어있었고 항공포의요청이나 응급환자수송에 필요한 “메드백”(헬리콥터)요청은 보다 신속하고 정확히 의사(意思)가 전달되어야하기 때문에 파견 나온 “앵리코맨”의 미군들이 직접 맡아 교신해 중대통신업무가 하나도 복잡하지 않았습니다만 야간에 매복조와 교신을 해야 할 상황실통신근무자가 졸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항상 걱정이었습니다.


  야간매복조는 소리 내어 교신할 수 없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송화기를 “훅 훅” 부는 신호로 긴급 상황을 알려왔으며 그땐 상황실통신근무자가 현장상황을 잘 예측가상해서 유도해 교신했는데 참으로 통신병의 역할이 대단했습니다.

  이제 갓 월남에 온 신참들도 몇 개월만 있으면

  “브라보(B) 탱고(T)"

하면서 81mm박격포 벙커에 매복조 좌표를 불러주는 등 능숙하게 상황을 처리해 역시 실전(實戰)의 경험이라는 것이 그 어떤 교육보다도 효과적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고 모두가 숙련되어 나무랄 대가 없었습니다.


  보병중대 통신반장은 편제(編制)상 원래는 하사가T/O였지만 베리야반도의 아홉중대는 증강된 부대로 내 전임(前任)자는 상사(上士)였으며 어느 정도 평정되었다고 판단되자 중사(中士)인 나를 보내 근무하게 하였고 다시 내가 교체되어 나올 때의 후임자는 또 하사(下士)로 점차 병력의 규모를 줄여나가 내가 귀국하고 난 바로 그해 12월 초부터 청룡부대가 월남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여 다음해인1972년 4월까지 모두 철수완료 했었습니다.


  누구의 강요도 아니었고 내 스스로 선택한 장기복무의 하사관생활이었지만

  한때는

  “나는 왜?”

  “20대 청춘을 군(軍)에서만 보내야 하나?”

하는 삐뚤어진 생각으로 방황하던 시절도 있었으나 그동안에 체험하고 익힌 인내력으로 배운 것 없고 물려받을 것 없어도 이제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으며 무엇이든 아무 일이나 못 할 것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1973년도에 11년이라고 하는 군(軍)생활을 끝으로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와 먼저 시작했던 것이 떡 방앗간이었습니다.

  우연히 사진관을 인수받아 기술도 익히게 되었고 학교앨범도 맡아 제작하면서 새로운 건물에 예식시설도 갖춰 결혼사진을 촬영할 때면 신혼부부의 탄생이 너무도 보람 있었습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돋보기를 끼고 또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싶어 고압가스기능사2급의 자격증을 취득하고 LPG가스 판매업소도 개설하여 너무도 순조롭게 그저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시골에서의 적지 않은 재산도 모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마냥 내편만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설마 했던 고엽제가 무쇠 같은 내 몸 서서히 갉아먹기 시작해 급기야는 1996년도 내로라하는 굴지의 병원에서 천추(薦椎)를 들어내고 다른 사람에 무릎종지뼈를 깎아 한쪽은 척추 끝에 다른 두 쪽을 엉덩이관절에 붙여놓는 4개과 전문의가 20시간에 걸친 대수술 끝에 재생될 수 있었지만 배변은 물론 소변도 인위적이 아닌 그런 방법으로 살아야하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어진 일에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임해 지금까지 원하는 것을 이루어왔지만 건강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었습니다.

  1년간을 거의 누워서 생활하다가 피나는 재활노력으로 차츰 앉아있게 되었고

  이제는

  “제발 좀 그만”

  앉아 있으라는 마누라 잔소리에도 고집을 부릴 정도로 많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참담한 저에 현실이 말해주듯 파월장병 우리 모두는 고엽제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과

  설령 지금은 건강하다 할지라도 몸속에 잔류된 고엽제가

  언제

  어느 때

  어떤 계기로 노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견해는 지금까지의 저에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확신을 갖고 피력하는 것입니다.


  전국각지에서 고생하시는 11만여 고엽제후유의증 전우여러분들에 쾌유를 빌면서

  이곳 vietvet 홈페이지를 위해 애쓰시는 분들

  그리고

  좋은 글

  좋은 그림

  좋은 음악 올려주신 많은 전우님들

  모두가 존경스럽고 참으로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211.245.146.146 손 동 인: 암울했고 어려웠던 전우님의 이야기 그 이야기가 우리들 이야기입니다,총장님 올려주신 고마운글 감명깊게 보고갑니다.감사합니다 -[11/06-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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